연재글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복선, 화려한 잔치 뒤에 그어진 하나님의 선 (뉴스앤조이) 20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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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화려한 잔치 뒤에 그어진 하나님의 선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에스더 1:1-12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붙는 듯하더라

금빛으로 열린 제국
수산 궁 후원 뜰. 햇빛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잘게 흩어지고, 흰색과 녹색과 청색 휘장은 바람 없는 허공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금잔은 손에서 손으로 옮겨 갈 때마다 작은 태양처럼 번쩍인다. 향료와 술 냄새, 웃음과 음악이 한데 뒤엉켜 밤을 밀어낸다.
귀족들은 왕의 미소를 읽고, 장수들은 술잔 가장자리에서 아직 출정하지 않은 전쟁을 헤아린다. 인도에서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의 이름들이 보이지 않는 깃발처럼 궁정 위에 펄럭인다. 크고, 많고, 화려한 모든 것이 왕을 향해 기울어 있다.
그 찬란한 잔치 한복판에 이상한 결핍 하나가 놓여 있다. 의자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비어 있다. 모두가 왕의 이름을 부르지만, 아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낯설다. 성경인데 성전이 멀고, 경전인데 기도의 목소리가 희미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지워진 듯한 이 첫 장은 오히려 우리의 세계를 비춘다. 그 이름의 흔적이 희미해지고 신앙의 언어가 뒤로 밀려난 거리와 일터에서, 에스더서는 묻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가.
제국의 잔치는 즐거움의 형식을 빌린 권력의 의식이다. 왕궁은 성전처럼 꾸며지고, 잔치는 제의처럼 반복되며, 왕의 이름은 찬양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 그러나 그 의식에는 하나님도, 사람의 얼굴도 없다. 남는 것은 스스로를 경배하는 권력의 눈부신 공허뿐이다.
그러나 이 잔치 마당에서 이미 에스더서 전체의 숲이 어른거린다. 왕의 과시는 하만의 교만을 예고하고, 와스디의 거절은 에스더의 결단을 멀리서 비춘다. 금잔이 놓인 잔치는 훗날 죽음의 날이 생명의 잔치로 뒤집히는 부림의 날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이 문지방에서 신앙은 묻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고 계신가.
첫 문장부터 제국은 지도를 펼친다.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인도에서 구스까지. 제국의 선 하나가 지도 위에 길게 그어진다. 한 왕의 이름 아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가 길게 당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그 크기를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의 거대함을 먼저 세워 둔 뒤, 그 한복판에 생길 균열을 기다리게 한다.
제국은 크기로 말한다. 영토, 지방, 숫자, 군대, 재물. 그것이 제국의 문법이다. 아하수에로는 백팔십 일 동안 자신의 부함과 위엄을 전시하고, 다시 칠 일 동안 백성을 잔치로 불러들인다. 잔치는 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에게 왕의 크기를 보게 하는 장치다.
금잔은 손마다 들려 있고, 잔의 모양은 저마다 다르다. 술은 한이 없다. 왕은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하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자유는 왕의 잔치 안에서만 허락된 자유다. 마실 자유는 있지만, 왕의 시선 밖으로 나갈 자유는 없다. 즐길 자유는 있지만, 제국의 장식물이 되지 않을 자유는 없다.
그 화려함은 너무 밝아서 오히려 불안하다. 많이 보여 주는 권력은 대개 감추고 싶은 어둠을 품고 있다. 금잔과 술, 긴 잔치와 끝없는 명령 사이로 마침내 작은 균열 하나가 들어온다.
와스디는 말하지 않는다. 항의문도, 변명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오지 않는다. 제국의 모든 소리가 왕을 향해 흐르던 밤, 한 여인의 부재가 처음으로 왕의 명령을 멈춰 세운다.
그 순간 궁정의 공기는 식었다. 술잔을 든 손들이 허공에 멈추고, 웃음소리는 낮아졌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왕의 명령은 처음으로 빈손이 되어 돌아왔다.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 자기 궁 안의 한 사람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스더서의 첫 번째 반전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된다. 아직 하만도 없고, 죽음의 조서도 없다. 다만 한 여인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오지 않음이 훗날 누군가 들어와야 할 자리를 만든다.
아직 사건은 오지 않았지만, 결말은 이미 작은 균열 안에 기울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지나친다.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보인다. 모든 것이 이미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음을.
와스디의 거절, 에스더의 왕궁 입성, 모르드개의 폭로, 왕의 잠 오지 않는 밤, 하만이 세운 나무, 뒤집히는 조서, 그리고 부림의 날. 처음에는 모두 작고 희미하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 그 작은 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었음을 보게 된다.
잔치와 명령, 거절과 분노, 그리고 새 자리를 만들기 위한 조서. 에스더서가 앞으로 반복하고 뒤집을 장면들이 이미 첫 문지방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사건과 사건 사이에 희미한 선을 잇고 계신다. 그 선은 시간이 지나서야 보인다.
빈 이름의 하나님
에스더서는 성경 안에서 가장 낯선 침묵을 품은 책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끝내 들리지 않는다. 기도의 목소리도 앞에 서지 않는다. 성전과 율법과 제사의 언어는 뒤로 물러나고, 왕궁과 조서와 잔치와 죽음의 날짜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온다. 하나님을 쉽게 말할 수 없는 곳, 신앙의 언어가 사적인 방으로 밀려난 곳, 권력과 문서와 제도가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곳에서 이 이야기는 조용히 열린다.
그 낯섦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멀어진 듯한 날이 있다. 기도는 허공에 머물고, 정의보다 권력의 명령이 먼저 도착하는 시간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문서가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한 이름이 명단에 오르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리가 가장 불안한 자리가 된다. 그런 세계에서 믿음은 성전에만 머물 수 없다. 서류와 명단과 권력의 언어 앞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서문은 과거의 궁정사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화려한 체제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장식품이 되는지, 문서와 명령이 사람의 얼굴보다 커질 때 공동체가 얼마나 쉽게 위험해지는지를 드러낸다. 믿음은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무실과 법정, 이민 서류 앞과 신분의 경계, 권력의 잔치와 침묵의 방 안에서도 시험받는다.
이 세계는 고대 페르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제국의 언어를 배우고, 제국의 이름으로 불리며, 제국의 법 아래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다.
하닷사라는 히브리 이름은 에스더라는 페르시아식 이름 뒤에 숨는다.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쉽게 드러낼 수도 없다. 어떤 시대에는 자기 이름을 낮게 접어 두어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침묵이 언제나 비겁함은 아니다. 어떤 침묵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숨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보존이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날카로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는가. 제국의 언어를 익히면서도 영혼의 모국어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모두가 권력의 잔치에 취해 있을 때, 한 사람의 거절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역사가 축제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화려한 바닥에서 누가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가.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화려하지만 불안하다. 성경은 그 위엄에 쉽게 압도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칠 만큼 길게 묘사된 화려함 속에 차가운 풍자를 숨긴다. 명령은 크게 울리지만 마음은 작고, 왕궁은 넓지만 자존심은 좁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듯 보이는 왕이 자기 앞에 오지 않은 한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 에스더서의 가장 깊은 질문이 열린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정말 부재하시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라진 하나님이 아니다.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고 부재하시는 것도 아니다. 때로 하나님은 기적의 전면이 아니라 사건의 배열 속에, 우연처럼 보이는 틈이 아니라 더 깊은 섭리 속에, 선포가 아니라 복선 속에 자신을 감추신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 사람은 자기 자리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기억을 몸으로 증언한다. 왕궁 한복판에서 자기 때를 깨달은 에스더는 마침내 말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믿음은 때로 큰 음성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결단 속에서 깨어난다.
이 책의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듯 등장하지 않으신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앞서가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하시고, 묻혀 있던 기록을 읽히게 하시며, 죽음의 날을 잔치의 날로 뒤집으신다. 하나님은 기적의 한복판보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가장자리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기보다 무대 뒤의 연출자에 가깝다.
복선은 운명을 미리 고정하는 장치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의미가 시간을 따라 드러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우연처럼 보인다. 나중에는 은총처럼 읽힌다. 처음에는 작은 거절처럼 보인다. 나중에는 구원을 위한 자리 비움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왕의 잠 못 드는 밤처럼 보인다. 나중에는 역사를 뒤집는 밤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연처럼 흩어진 사건들 사이에서, 은밀히 이어지는 선을 따라가는 일이다.
오지 않은 왕후
와스디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곧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비어 있음이 아니다. 오히려 자리를 만든다. 와스디의 거절이 없었다면 에스더의 등장은 없다. 에스더의 등장이 없었다면 유다인의 위기는 왕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모르드개의 말이 없었다면 에스더는 자기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깨닫지 못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이 말은 4장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이미 1장의 균열 속에 조용히 놓인 복선이었다.
그러므로 에스더서의 시작은 단순한 궁중 소동이 아니다. 한 제국의 질서가 얼마나 쉽게 여성의 몸과 아름다움을 전시물로 만들 수 있는지, 동시에 그 질서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와스디의 거절은 에스더의 용기와 같지 않다. 두 인물의 역할도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은 두 여인의 이야기를 묘하게 맞물리게 한다. 한 여인은 오지 않음으로써 제국의 허영을 드러내고, 다른 한 여인은 들어감으로써 제국의 폭력을 막아 낸다. 와스디의 용기는 오지 않는 데 있었고, 에스더의 용기는 마침내 나아가는 데 있었다.
와스디가 오지 않은 자리에는 제국이 통제하지 못한 빈자리가 생겼다. 그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른 이야기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는 첫 자리였다. 끝처럼 보이는 자리가 다음 장면의 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에스더서가 보여 주는 복선의 힘이다.
그 빈자리가 에스더서의 문이다.
그 문 앞에 서게 될 에스더도 처음부터 용감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숨고, 머뭇거리고, 두려워한다. 왕 앞에 나아가는 일이 죽음일 수 있음을 안다. 모르드개도 완전한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하만의 악은 분명하지만, 이야기의 윤리적 결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도 언제나 순수한 동기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두려움과 지혜, 침묵과 용기, 생존과 사명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흔들림 안에서도 일을 시작하신다.
에스더서의 첫 장은 우리를 낯선 문 앞에 세운다. 성전이 아니라 궁전, 기도가 아니라 잔치의 문 앞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성경은 묻는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금잔인가, 균열인가. 왕의 위엄인가, 한 여인의 거절인가. 하나님의 부재인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복선인가.
누구에게나 수산 궁의 밤이 있다. 사람들은 웃고, 잔치는 계속되는데, 내 이름만 불리지 않는 밤. 기도했지만 대답은 오지 않고,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버려진 것 같고, 늦어진 것 같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날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이 버려진 것은 아니다. 아직 해석되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의 빈자리도 훗날 누군가를 살리는 문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처음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어떤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고, 어떤 실패는 낭비처럼 보이며, 어떤 침묵은 버림받음처럼 보인다. 어떤 거절은 끝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일이 있다. 그때의 빈자리 때문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때의 멈춤이 다른 길을 열었다. 그때의 밤이 묻혀 있던 기록을 깨웠다. 그때의 두려움 속에서 마침내 해야 할 말이 태어났다.
에스더서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 보이지 않던 선들이 서로 이어진다. 우연이라 여겼던 일들이 은총의 자리를 만들고, 끝이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구원의 문이 된다.
그러니 이 책 앞에서 잠시 멈추어도 좋다. 내 삶의 잔치는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나를 움직이는 왕명은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나는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아직 해석되지 않은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선을 조용히 이어 가고 계신가. 어쩌면 우리가 우연이라 부른 자리마다, 하나님은 이미 복선을 긋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 에스더서의 해석사는 결국 이 책의 침묵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둘러싼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어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직접 나오지 않는다. 이 낯섦 때문에 에스더서는 정경 안에서도 그 신학적 의미를 두고 오랫동안 질문을 받아 왔다. 그리스어 에스더서는 기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덧붙여 그 침묵을 채우려 했고, 유대 전통은 이 책을 부림절의 기억으로, 그리스도교 해석은 하나님의 부재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섭리를 읽는 책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연구는 에스더서를 역사 기록으로만 보지 않고, 정교한 서사 예술이자 디아스포라 생존의 이야기로 읽는다. 마이클 폭스는 인물과 이념의 긴장을, 아델 벌린은 고대 이야기 예술과 풍자를, 존 레벤슨은 유대 공동체의 위기와 구원의 기억을 주목했다. 이 흐름 속에서 에스더서 1장은 오래된 궁중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도 믿음이 어떻게 숨고, 견디고, 때를 기다리며, 마침내 섭리의 복선을 읽어 내는지를 묻는 문지방으로 남는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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