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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연재) (뉴스앤조이) 202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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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9회   작성일Date 25-04-17 11:10

    본문

    바다를 건너는 글 ― 요나서 앞에 서며

     

    연재를 시작하며

    글은 바다를 닮았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나고, 그 밀려남과 밀려듦 사이로 어떤 이야기는 떠오르고, 어떤 침묵은 가라앉습니다.

    밀물과 썰물처럼 출렁이는 말들이 항구에서 여객선을 타고, 물고기 뱃속을 지나, 어느 도시의 골목까지 우리 안의 이야기를 데려왔습니다. 그건 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삭임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요나가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뉴욕주 북쪽 호숫가.

    파도가 잠든 물가에 자리한 실버베이 YMCA의 낡은 책상에서 요나서를 읽었습니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구절 하나가 내 안의 침묵을 깨우기 시작했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요나와 마주앉았습니다. 그 만남은 뉴욕의 강단으로 이어졌습니다.

    2024년 7월부터 12월까지, 나는 뉴욕우리교회 주일 강단에서 요나서 4장을 전체를 따라가며, 열일곱 번에 걸쳐 ‘Why 시리즈’를 선포했습니다.

    그 설교들이 이제 바다를 건너, 독자들에게 닿을 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설교가 끝날 때마다 말씀의 여운이 가슴 안에 작은 울림으로 남았고, 나는 그 울림을 시 한 줄로 받아 적었습니다.  그 시들이 이번 연재의 뒷장을 가만히 덮고 있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나는 요나처럼 도망치던 아이였습니다.

    소라 껍데기 속에 숨는 작은 소라게처럼, 

    세상으로부터 몸을 말고 숨어 들던 아이.

    요나처럼 도망치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 

    그 사람이 나였습니다.

    지금도 말씀 앞에 부끄럽고,

    그 부끄러움을 안고 다시 길 위에 서는 사람입니다.

     

    왜 요나서인가?

    요나서는 예언서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예언서 입니다. 

    말보다 침묵이 무겁고 외침보다 회피가 먼저 오는 이야기. 그리고 단 하나, 구약의 열일곱 예언서들 가운데서도 요나서만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도시 니느웨를 무대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넘고, 민족을 넘고, 신념의 벽을 넘습니다. 하나님은 국경도 넘고, 교회 울타리도 넘으십니다. 그 시선을 피한 요나는 결국 그 시선에 잠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지금도 우리에게 불편한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연민보다 나의 옳음이 앞서는 시대, 요나는 오늘도 말없이 다시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21세기에 요나서인가?

    우리는 회개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내면을 마주할 용기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를 하루하루 좁혀가고 있습니다.

    21세기 우리는, 평화와 정의조차 각자의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자기 확신에 갇힌 요나가 되어갑니다. 편협한 옳음들이 모여 세상을 더 어지럽히고, 자기 신념에 잠긴 이들은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바다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나처럼 흔들립니다.
    요나는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도망친 사람도, 분노한 사람도, 회피한 사람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그러니 우리는 다시 요나서를 읽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다시스로 향해 가는 이 시대의 배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 바다에 던져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바다 끝자락에서 시작된 열일곱 개의 물음표.
    그 물음마다 나는 시 한 줄로 응답했습니다.
    그 질문들은 요나인 내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런 물음에 이미 멈춰 섰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앞으로 문득 이 질문들에 맞닥뜨릴지도 모릅니다.

    “왜 피하는가?”

    “왜 막으시나?”

    “왜 자려느냐?”

    “왜 그것이 우선인가?”

    “왜 그것이 딜레마인가?”

    “왜 나는 희생해야 하나?”

    “왜 바닥인가?”

    “왜 은혜인가?”

    “왜 사는가?”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왜 다시 제자리인가?”

    “왜 나는 정당해야만 하나?”

    “왜 성내는가?”

    “왜 구경만 하는가?”

    “왜 기대하지 않는가?”

    “왜 흔들리는가?”

    “왜 아끼는가?”

    이 열일곱 개의 물음표가 당신의 신앙에 쉼표가 되기를, 때로는 느낌표가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마침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물음들은 단지 요나의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내 일터와 가정, 교회와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당신의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물음 끝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아닌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여운을 당신에게도 건네고 싶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요나는 오늘도 또 다른 얼굴로 우리 곁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들었던 침묵의 떨림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떨림이 글이 되어 바다를 건너 당신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조원태 씀

    2025년 부활절 직전, 뉴욕의 작은 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