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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애도, 왕은 왜 먼저 올어야 하는가 (뉴스앤조이) 202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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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9회   작성일Date 26-03-19 09:49

    본문

    애도, 왕은 왜 먼저 울어야 하는가

    •  
     

    사무엘하 1:1–2 / 사무엘하 1:17-19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자손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새 시대가 열리면 사람들은 먼저 왕관을 찾는다. 누가 올라섰는지, 누가 밀려났는지, 이제 나라가 어디로 기울지를 서둘러 계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조급한 시선을 처음부터 거절한다. 즉위의 나팔보다 먼저 비보가 도착하고, 왕관의 광채보다 먼저 전쟁터의 먼지와 찢어진 옷자락이 눈앞에 흔들린다. 권좌보다 먼저 울음이 들린다. 왕의 시대가 열리는데, 먼저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의 상승이 아니라 한 시대의 죽음이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전에, 먼저 그를 상실의 한가운데 세워 둔다.

    바로 이 낯섦이 첫 인상이다. 왕국은 막 문을 열려 하는데, 이야기는 그 문설주에 상복을 걸어 둔다. 영광의 계단이 아니라 상실의 문턱에서 시작한다. 왕의 이야기는 어째서 승리가 아니라 애도로 문을 여는가.

    다윗의 시대를 열면서도 곧바로 그를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서두리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의 몰락을 딛고 올라서는 방식으로는 왕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분명히 보여 준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성공인가. 아니면 한 공동체의 상실을 끝까지 기억하는 일인가. 왕의 자리를 먼저 내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지나야 할 슬픔을 먼저 보여 준다.

    그래서 1장은 애도의 형식으로 쓰인 왕권의 서문이 된다. 사울의 죽음은 한 왕의 최후이면서, 이스라엘 전체가 통과해야 할 상실이다. 요나단의 죽음은 친구 한 사람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다윗의 내면과 나라의 미래를 함께 흔드는 균열이 된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흔들림의 문턱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떨림 속에서, 다윗의 얼굴보다 먼저 한 나라의 슬픔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찢어진 옷

    사울이 죽은 뒤, 한 아말렉 사람이 다윗 앞에 나타난다. 그의 옷은 길게 찢어져 있고 머리에는 흙이 얹혀 있다. 그는 멀리서도 이미 패배의 냄새를 몸에 묻힌 사람처럼 보인다. 전쟁터의 먼지와 죽음의 소문을 함께 끌고 온 자의 얼굴이다.

    그는 사울이 죽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그를 죽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왕관과 팔찌를 꺼내 다윗 앞에 내민다. 그것은 단순한 전리품이 아니다. 한 시대의 끝을 손에 쥐고 와, 다음 시대의 문을 두드리는 몸짓이다.

    그의 계산은 선명하다. 사울은 다윗을 오랫동안 추격한 왕이었다. 광야의 어둠 속에서도, 산지의 굴속에서도, 다윗의 숨을 끝까지 쫓던 사람이다. 그러니 다윗은 마땅히 기뻐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왕의 죽음은 곧 새 왕의 기회라고 여긴다. 패배의 자리에서도 그는 권력의 속도를 읽는다. 남의 끝이 내 시작이 되고, 죽음이 곧바로 기회로 번역되는 세계를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왕관은 아직 식지 않은 죽음의 온기를 품고 있는데, 그는 이미 그 금속의 빛 속에서 다음 시대의 윤곽을 본다. 무너진 자리마다 늘 먼저 달려온 것은 애도보다 계산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왕관보다 죽음을 먼저 본다. 반짝이는 금속보다 그 왕관이 지나온 피와 먼지를 먼저 본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 옷을 찢고, 저녁까지 슬퍼하며 운다. 울음은 짧지 않다. 해가 기울 때까지 이어진다.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와 있는데도, 다윗은 그 문으로 서둘러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의 질서가 세워진다. 다윗에게 권력은 상실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가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왕좌를 향해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 먼저 죽은 자를 위해 멈춘다. 먼저 울고, 금식하고, 기억한다.

    그 멈춤은 왕이 되는 길이 속도의 길이 아니라 무게를 견디는 길임을 보여 준다. 바로 이 장면이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를 먼저 비춘다. 왕의 영광보다, 그 시대가 어떤 상실 위에서 시작되는지를 드러낸다. 승리의 개막전이 아니라 애도의 문턱을 보여 준다. 다윗을 큰 인물로 세우기 전에, 먼저 그가 얼마나 오래 슬픔 앞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 준다. 

     

    왕이란 누구인가.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구보다 오래 상실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을 첫 장면 깊숙이 새겨 둔 채, 이야기는 다윗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다.

     

     
    슬픔의 자격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애가를 짓는다. 전쟁은 이미 끝났고,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몸은 이미 쓰러졌다. 그런데 이 본문이 오래 붙드는 것은 누가 살아남았는가가 아니라, 그 죽음을 이제 어떤 말로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여기서 무게는 전쟁의 결과보다 죽음을 말하는 방식에 실린다. 누군가의 죽음은 조롱의 재료가 될 수 있고, 정적의 제거라는 이름으로 소비될 수도 있다. 패자의 마지막은 쉽게 승자의 선전문으로 바뀐다.

    그러나 다윗은 그 죽음을 노래로 바꾼다. 복수의 언어가 아니라 애도의 언어로 감싼다. 칼이 지나간 자리를 입술이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는 먼저 노래를 세운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마치 해 질 무렵 길보아 산등성이에 마지막 빛이 걸린 듯, 이 한 문장은 오래 흔들리며 남는다.

    다윗은 사울을 “영광”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다. 사울의 실패와 폭주를 덮어 버리는 말도 아니다. 다윗이 붙드는 것은 한 사람의 어둠을 지워 낸 뒤의 깨끗한 초상이 아니라, 그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가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죄와 함께 그가 지녔던 무게까지 끝내 바라보는 것, 그 복잡함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 것, 바로 거기에 애도의 품격이 있다. 원수였던 사람을 마지막 순간까지 적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 태도, 그것이 애도의 윤리다.

    애도는 감상과 다르다. 감상은 슬픔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애도는 그 앞에 오래 머문다. 감상은 자기 마음을 달래지만, 애도는 죽은 자의 무게를 끝내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애도는 상대를 이용하지 않는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처형한 것도 바로 이 지점과 이어진다. 죽음을 기회로 바꾸려는 사람은 왕의 나라를 열 수 없다는 뜻이다. 타인의 몰락을 자신의 상승으로 번역하는 사람은 이 왕권의 윤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피 묻은 끝을 발판 삼아 더 높이 올라가려는 손에는, 참된 통치의 무게가 놓이지 않는다.

    그래서 첫 장면은 정치적 판단을 넘어서는 윤리적 선언이 된다. 왕이 된다는 것은 먼저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다윗의 왕권은 군사력이나 혈통보다 앞서 애도하는 능력 위에 놓인다.

    아마 그래서 왕의 이야기는 울음으로 시작되는지 모른다. 어쩌면 왕의 머리 위에 씌워지는 왕관보다, 그 왕관을 쓰기 전에 가슴속에 먼저 놓여야 할 슬픔이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기억의 노래

    다윗은 이 슬픔을 자기 안에만 묻어 두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유다 자손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한다. 슬픔은 노래가 되고, 노래가 교육이 되며, 교육이 공동체의 기억이 된다. 애도는 개인의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새기는 일이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왕의 책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책이 된다. 전투가 있고, 정치가 있고, 영토는 넓어지고 왕궁은 세워진다. 그러나 그 번영의 깊은 곳으로는 끝내 상실이 스며든다.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고, 아브넬이 죽고, 밧세바의 아이가 죽고, 암논이 죽고, 압살롬이 죽는다. 왕국은 커지지만 집은 흔들리고, 힘은 확장되지만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성공의 연대기처럼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잃어버린 이름들을 오래 불러 주는 책처럼 읽힌다.

    어쩌면 이 서문은 사무엘하 전체를 멀리까지 끌어당겨 보여 주는 망원경 같은 장면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길보아의 바람과 찢어진 옷과 애가만 보인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더 멀리 두면, 그 뒤로 펼쳐질 스물 네 장의 빛과 그늘이 함께 어른거린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렬도 보이고, 언약궤 앞에서 춤추는 왕의 발도 보이고, 높아진 자리에서 한순간 어두워지는 시선도 보인다. 칼이 집 안으로 들어와 아들의 이름을 베고, 반역의 먼지가 성문을 뒤덮고, 울며 감람산을 오르는 늙은 왕의 뒷모습도 보인다. 마지막에는 백성의 수를 헤아리려다 한밤의 재앙 앞에 멈춰 서는 장면까지 보인다. 그렇게 보면 처음의 애도는 단지 시작의 눈물이 아니다. 왕국 전체에 길게 드리울 슬픔의 결을 미리 보여 주는 첫 떨림이다.

    ‘애도’는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은 결을 드러낸다. 다윗의 승리만 기록하지 않는다. 그 승리 안에 남은 상처와,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왕의 마음을 함께 기록한다. 이 문지방에 서 있으면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머물게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 시대를 시작하는가. 승리인가. 속도인가. 기회인가. 아니면 멈춰 서서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인가.

    다윗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넘어질지를 끝까지 보여 준다. 그럼에도 첫 장면은 지우지 않는다. 다윗이 처음 보여 준 것은 정복자의 표정이 아니라 슬퍼하는 얼굴이었다는 사실을 끝내 남겨 둔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실패를 뉴스로 소비하고, 누군가의 몰락을 내 확신의 증거로 삼는다. 댓글과 화면과 속보의 언어는 한 사람의 무너짐을 순식간에 해석하고, 편 가르고, 다음 장면으로 밀어 넣는다. 슬픔조차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오래된 이야기는 그 속도를 멈춰 세운다. 누군가의 끝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가. 아니면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잠시 멈추는가. 어쩌면 한 사람의 인간됨은 바로 거기서 갈린다. 한 공동체의 품격도 그 자리에서 결정된다. 

    끝내 울어야 할 때 울 줄 아는 사람, 잊지 말아야 할 이름 앞에서 오래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한 시대의 얼굴이 드러난다.


    ※ 첫 장면은 왕권 신학의 출발점을 압축해 보여 준다. 여기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왕의 정당성보다 왕의 자격이다. 사무엘상에서 백성이 왕을 요구했다면, 여기서는 그 왕이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시작이 애도라는 사실은 가볍지 않다.

    사무엘서 연구는 오래전부터 다윗 이야기를 단순한 영웅 서사로만 읽지 않았다. 브루그만은 이 서사를 권력과 상실의 긴장 속에서 읽었고, 알터는 사건 못지않게 서사의 배열과 호흡이 의미를 만든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런 해석의 흐름에서 보면, 이 장면의 핵심은 분명하다. 왕관보다 애가가 먼저 온다.

    그래서 1장은 장례 노래를 넘어 왕권과 기억의 서문이 된다. 다윗은 아직 왕좌에 완전히 앉지 않았지만 이미 왕의 윤리를 드러낸다. 그는 죽음을 이용하지 않는다. 먼저 슬퍼하고, 먼저 기억하고, 그 슬픔이 공동체 안에 남도록 한다. 여러 주석가들이 공통으로 짚어 온 것처럼, 이 대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힘 그 자체보다 그 힘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 문지방 앞에서 독자는 자기 삶의 서문도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은 무엇으로 시작되고 있는가. 이기려는 마음인가. 잊으려는 속도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잊지 않으려는 깊은 애도인가. 어쩌면 예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의 복도 그 자리와 멀지 않을지 모른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상실 앞에 머물며, 타인의 아픔을 자기 유익으로 바꾸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위로가 먼저 다가온다는 뜻에서 말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