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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부름, 이름이 먼저 울리는 문턱 (뉴스앤조이) 20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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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회   작성일Date 26-01-28 17:30

    본문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름이 먼저 울리는 순간

    광야 한가운데, 이동식 성소의 문턱에서, 하나님은 규정을 펼치기 전에 이름을 부르신다. 레위기가 이 방식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명령으로 독자를 밀어 넣지 않고, 호명으로 먼저 멈추게 한다.

    레위기는 제사의 목록으로 문을 열지 않는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직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사람이 불리고, 그 부름 앞에 서는 시간이다. 차가운 규정의 두루마리보다 먼저 놓인 것은, 요구가 아니라 관계를 여는 부름의 음성이다. 한 존재가 고개를 들고, 자신이 불린 존재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첫 단어 그대로 “와이크라—그가 불렀다”이다. 

    이 책은 규례가 아니라 동사로 시작한다. 무엇을 하라는 지시보다, 누군가를 향해 건너오는 음성이 먼저 놓인다. 율법의 무게는 그 다음에야 비로소 도착한다. 부름이 먼저이고, 응답은 그 다음이다. 하나님은 앞서 다가오고, 인간은 그 부름에 반응하며 움직인다. 관계는 요구로 시작되지 않고, 호명으로 열린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가’를 묻게 한다. 이 순서가 무너지면, 레위기는 잔인해진다. 규례만 남고 얼굴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순서가 살아 있으면, 레위기는 친밀해진다. 명령의 책이 아니라, 관계의 책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해방 다음에 필요한 것

    왜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해야 했을까. 출애굽은 해방의 사건이었다. 바다를 건넜고,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억압의 구조는 무너졌고, 몸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해방은 아직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탈출은 끝났지만, 동행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유는 곧바로 친밀을 보장하지 않는다. 자유는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지만, 관계는 머무는 시간을 요구한다.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함께할 것인가는 해방 이후에야 묻기 시작된다. 레위기는 바로 그 질문이 머무는 시간의 책이다. 방향보다 리듬을, 속도보다 간격을 가르치는 책이다.

    해방된 백성은 곧바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바다는 건넜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집트의 리듬을 기억한다. 해방은 출발이지만, 관계는 훈련이다. 레위기는 해방 이후의 삶이 무엇으로 유지되는지를 묻는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거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다시 배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위기는 여정의 앞도, 뒤도 아닌 광야의 한가운데 멈춰 서 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달리기 전에, 멈추어 서는 법을 가르친다. 부름에 응답하며 머무는 시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음 걸음이 가능해진다.

     

    다가가기 위해 주어진 말들

    이 서문은 책 전체의 복선이다. 뒤이어 펼쳐질 제사 규례, 피와 불과 향의 언어는 모두 하나의 질문을 향해 흐른다. “부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레위기의 제사는 신을 달래기 위한 대가의 체계가 아니라, 부름에 응답하여 거리를 건너는 방식의 언어다. 제물은 값을 치르는 수단이 아니라, 가까워지려는 몸짓이다.

    히브리어 코르반—우리말 성서에서 흔히 ‘제물’이나 ‘예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그 뿌리는 ‘가까이 나아가다’라는 동사에서 나온다—은 레위기의 신학을 압축한다. 제사는 무엇을 바치는 행위라기보다, 어디로 이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 정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단절된 거리를 다시 연결하기 위한 장치다.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언어다.

    이 지점에서 ‘부름’은 단순한 서두의 표현이 아니라, 레위기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원리가 된다. 예배는 중요하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예배는 먼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다. 먼저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예배가 형성된다. 부름 없는 예배는 공연으로 변질되고, 응답 없는 규례는 억압의 도구가 된다. 레위기는 이 위험을 서문에서 이미 차단한다. “여호와께서… 부르시고.” 이 한 문장 아래에서만, 모든 규정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제단에서 삶으로

    레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을 말한 뒤, 그 다가옴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묻는다. 제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레위기의 앞부분이 예물의 언어라면(레 1-16), 뒷부분은 거룩의 언어다(레 17-27). 회막 안에서 드려진 것이, 진영 한가운데서 살아지는 방식으로 번역된다. 예배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형식이 된다.

    이 흐름을 가장 짧게 요약한 문장이 바울의 고백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바울은 새로운 말을 만든 것이 아니라, 레위기의 방향을 다른 언어로 다시 말했다. 예배는 제단에 머무르지 않고, 몸을 통과해 삶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신약은 이 레위기의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끝까지 밀어붙인다. 예수는 코르반이 되어 우리 앞에 서셨다.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마련된 길이, 마침내 그분 자신이 길이 되셨다. 화목제물이 되어 관계를 회복하셨고, 번제가 되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다. 제단 위에 놓인 것은 더 이상 짐승의 몸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애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이제 규례의 축적이 아니라 한 존재를 통과하는 길이 되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레위기가 묻던 ‘어떻게 가까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누구를 통과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예수는 제사를 폐기한 분이 아니라, 그 모든 제사가 지향하던 접근을 몸으로 이루신 분이 되셨다.

    이 서문은 오늘 이 글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규정의 성서’를 펼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허용되는지를 묻느라, 정작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 않은가. 레위기의 문지방에 서면, 독자는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멈춰 선다. “나는 지금 누구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는가.”

    레위기는 불편한 책이다. 그래서 쉽게 건너뛴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을 제대로 들으면,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규정의 숲이 아니라 관계의 숲이 보이기 때문이다. 피의 언어 너머에서, 여전히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리기 때문이다.

    부름은 과거형이 아니다. 레위기의 첫 문장은 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매 독서의 현재형이다. 성서를 펼칠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문지방에 선다. 규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불린 존재로 선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면, 질문이 바뀐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가”에서 “나는 어떤 응답을 살고 있는가”로.

    레위기는 그 질문을 남긴 채, 안쪽으로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문지방에서, 이름을 부른다.

    ※ 최근 레위기 연구 역시 이 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한때 레위기는 제사 제도나 편집사, 혹은 율법의 폭력성을 설명하는 자료로 주로 읽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규례 중심의 읽기는 규례를 통해 형성되는 관계의 신학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제이콥 밀그롬(Jacob Milgrom)은 제사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언어로 읽었고,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는 ‘거룩’을 배타적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삶을 배열하는 질서로 해석했다. 고든 웬함(Gordon J. Wenham)과 사무엘 발렌타인(Samuel E. Balentine) 역시 레위기를 하나님이 먼저 다가와 인간을 부르시는 ‘접근의 신학’으로도 조명한다. 이 흐름 속에서 레위기 1장 1절의 ‘부르심’은 명령 이전의 관계, 제도 이전의 호명으로 다시 들린다. 어쩌면 레위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규정보다 먼저 이름을 불러 왔는지도 모른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