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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증언, 빼앗긴 땅이 입을 열 때 (뉴스앤조이) 202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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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회   작성일Date 26-09-10 09:46

    본문

    증언, 빼앗긴 땅이 입을 열 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미가 1:1-5
    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5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어젯밤까지 그의 밭이었다. 아침이 되자 낯선 발자국이 흙 위에 찍혀 있었다. 포도나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같은 자리에서 잎을 폈다. 집의 문짝에는 어제 저녁 그가 밀어 닫은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밭도, 그 집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땅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다. 오래 살아온 자리에서 한 사람이 지워졌다. 포도나무만 그 사실을 몰랐다.

    미가서는 그런 땅에서 시작한다. 첫 장면은 울음이 아니라 법정의 소리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사람들만 불려 나오는 것이 아니다. 땅도 불려 나온다. 산과 골짜기,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까지 한자리에 선다. 오래 밟힌 흙과 빼앗긴 자리들이 말없이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증언하신다.

    미가의 서문에서 땅은 배경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빼앗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증인이다.

    미가의 증언은 빼앗긴 밭에서 시작해 평화의 들판까지 간다. 기울어진 판결과 돈에 흔들리는 예언을 지나, 칼이 보습이 되고 창이 낫이 되는 날을 바라본다. 작은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죄마저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첫 장의 법정은 이미 마지막 장의 긍휼을 품고 있다.


    땅이 법정이 되었다

    미가의 첫 문장은 시대와 장소를 먼저 적어 둔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미 1:1). 왕들의 이름은 세 번 이어진다. 그러나 미가의 이름 뒤에는 왕궁도 성전도 없다. 다만 한 지명이 붙는다. 모레셋.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신앗시리아의 팽창이 남북 왕국을 짓누르던 때였다. 유다 남서부의 모레셋에는 제국의 발자국이 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미가의 말에는 흙이 묻어 있다.

    그는 나라를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 밭에 서서 도시를 바라본다. 왕궁의 창문에서 농촌을 보는 대신 농촌의 먼지 속에서 왕궁을 본다. 그의 말이 닿는 곳마다 지명이 나온다. 사마리아, 예루살렘, 모레셋, 라기스, 그리고 이름 작은 마을들.

    미가의 말은 지도를 닮았지만 그가 그린 것은 길의 지도보다 양심의 지도에 가깝다. 어디가 높은가보다 누가 높아졌는지, 어디가 무너졌는가보다 누가 누구를 무너뜨렸는지를 표시한다.

    1절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한 줄에 놓는다. 북쪽의 수도와 남쪽의 수도. 서로 다른 운명을 믿었을 두 도시가 미가의 지도에서는 같은 색으로 칠해진다.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미 1:5).

    죄의 주소가 변두리에 찍히지 않는다. 중심에 찍힌다. 힘이 모이고, 말 한마디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는 곳. 미가는 가장 낮은 곳을 탓하지 않고, 가장 높은 곳을 먼저 바라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오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미 1:3) 산이 녹는다. 골짜기가 갈라진다. 불 앞의 밀초처럼, 비탈을 타고 쏟아지는 물처럼.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시는 장면은 장엄하지만, 그 풍경에는 아름다움보다 서늘함이 먼저 감돈다. 영원할 것 같던 것이 무너진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것이 벌어진다. 높다는 이유만으로 오래 남는 것은 없다.

    이 장면은 미가서 전체의 첫 복선이다. 높은 곳은 계속 낮아지고, 낮은 곳에서 뜻밖의 미래가 시작된다. 권력의 중심 예루살렘은 심판받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베들레헴에서는 새로운 통치자가 나온다.

    큰 도시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마을에서 미래를 시작한다. 미가는 지리의 높낮이를 뒤집어 윤리의 높낮이를 묻는다. 무엇이 정말 높은가? 누가 정말 큰가?

    오늘 우리는 다른 종류의 지도를 들고 산다. 집값과 학군과 소득이 색으로 나뉘고, 몇 번의 클릭이면 어느 동네가 오르고 어느 동네가 밀려나는지 알 수 있다. 지도는 더 정밀해졌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은 더 흐려졌다.

    미가는 그 지도 위에 다른 선을 긋는다. 가격보다 고통을, 성장보다 빼앗긴 자리를 본다. 어디가 비싼가보다, 그 비싼 자리에서 누가 밀려났는지를 묻는다.

    오래 밟힌 문지방과 경계가 사라진 밭, 사람이 떠난 뒤 비어 있는 방도 자기 방식으로 증언한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지도에는 누구의 자리가 지워져 있는가?


    집을 삼키는 도시

    미가서 2장에는 밤이 나온다. 사람들이 자리에 누워 악을 꾀한다. 아침이 오면 그대로 실행한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미 2:2). 한 가족의 긴 시간이 무너진다.

    밭에는 해마다 같은 계절이 돌아왔을 것이다. 씨를 뿌리고, 거두고, 자녀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집에는 저녁마다 불이 켜지고, 식탁이 놓이고, 아이가 잠들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탐욕은 먼저 사람의 삶을 숫자로 바꾼다. 그래야 빼앗기 쉽기 때문이다.

    미가가 분노하는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다. 가난을 만들어 내는 권력이다. 3장에 이르면 지도자들은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고, 뼈를 꺾는 사람들처럼 묘사된다. 잔인한 비유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사는 질서는 이미 그렇게 잔인하다.

    법과 종교와 경제가 한쪽으로 기울면, 가장 먼저 약한 사람의 몸이 상한다. 도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안에서는 누군가가 조금씩 사라진다.

    예언자도 예외가 아니다. 대가를 받으면 평화를 말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하면 전쟁을 선포한다. 제사장은 삯을 받고 가르치고, 선지자는 돈을 받고 점친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미 3:11).

    하나님의 이름은 입에 남아 있는데, 사람은 그 말 밖에서 상처 입는다. 성전은 서 있는데, 성전 밖의 삶은 무너진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은 갑자기 떨어진 표어가 아니다. 긴 송사 끝에 남은 세 걸음이다.

    정의. 인애. 겸손.

    미가는 제사를 없애자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배가 삶의 폭력을 가리는 커튼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얼마나 가져왔는가보다, 사람 곁에서 어떻게 걸었는가.

    그 오래된 문장은 오늘의 삶 앞에서 더 날카로워진다. 우리는 사람의 삶을 너무 쉽게 가격으로 번역하는 시대를 산다. 집은 사는 곳이면서 상품이 되고, 동네는 함께 사는 자리이면서 수익률의 지도가 된다. 어떤 개발은 누군가에게 떠나야 할 이유가 된다. 숫자는 오르고, 사람은 밀려난다. 어느 순간 가격만 남고 얼굴은 사라진다.

    교회도 그 질문 밖에 서 있지 않다. 예배가 이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도, 약한 사람의 자리부터 지워진다면 중심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예언자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기 전에 현재를 정확히 보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커졌는지가 아니라, 그 크기 때문에 누가 작아졌는지를 보는 사람. 누구의 집이 넓어졌는지가 아니라, 그 곁에서 누구의 집이 사라졌는지를 보는 사람.

    그 눈을 갖는 일은 불편하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 뒤에 누군가의 긴 노동이 있고, 내가 안전하게 선 자리 바깥에 누군가의 불안한 밤이 있다.

    증언은 그렇게 시작된다. 말하기 전에 보는 일. 판단하기 전에 오래 바라보는 일. 미가는 우리를 추상적인 정의 앞에 세우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밭과 집 앞에 세운다.

    그리고 묻는다. 정의가 사라진 평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애를 잃은 종교는 누구를 살릴 수 있는가? 겸손 없는 걸음이 과연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일 수 있는가?


    칼이 밭을 배우는 날

    미가서의 놀라움은 그렇게 매서운 책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데 있다. 심판의 말 뒤에서 갑자기 다른 풍경이 열린다. 산 위에 성전이 서고, 여러 민족이 그리로 올라간다(미 4:1–2). 더 강한 무기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칼을 두드려 보습을 만들고, 창을 두드려 낫을 만든다.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 4:3).

    쇠는 그대로다. 다만 향하는 곳이 달라진다. 사람을 찌르던 금속이 흙을 가르고, 피를 흘리던 도구가 씨앗을 기다린다. 칼이 밭을 배우는 것이다.

    이 장면을 읽으면 1장의 산이 떠오른다. 그때 산은 하나님 앞에서 녹았다. 이제 4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간다. 무너졌던 산이, 평화를 배우는 자리가 된다.

    미가서는 땅을 무너뜨린 뒤 버리지 않는다. 같은 땅에 다른 미래를 그린다. 그 미래는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미 5:2).

    큰 것이 세상을 구할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미가는 작은 마을을 바라본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 구절을 예수의 탄생과 연결해 읽어 왔다.

    그러나 평화는 먼 풍경으로만 남지 않는다.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일 속으로 내려온다. 칼을 보습으로 만드는 일은 먼저 손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상처 입히던 말을 거두고, 관계의 창끝을 낮추고, 빼앗은 자리를 돌려놓는 일.

    평화는 전쟁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더 이상 도구로 쓰지 않기로 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미가서 마지막에는 한 질문이 남는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 7:18).

    첫 장에서 하나님이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자 산이 녹았다. 마지막에는 죄악을 밟으시고,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 처음에는 산이 무너졌고, 끝에서는 죄가 가라앉는다. 심판으로 시작된 발걸음은 마침내 긍휼의 자리로 향한다.

    불의를 지나치지 않으시지만, 사람을 그 불의 속에 영원히 가두지도 않으신다. 죄를 드러내시지만, 돌아올 길까지 지우지는 않으신다. 산을 녹일 만큼 거룩하고, 죄를 바다 밑에 가라앉힐 만큼 긍휼하다. 미가서에서 정의는 빼앗긴 자리를 돌아보게 하고, 자비는 다시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둔다.

    그래서 첫 장의 법정은 마지막에 가서 다른 빛을 얻는다. 빼앗긴 밭이 다시 밭이 되고, 사람을 향하던 칼이 흙을 향하며, 작아서 보이지 않던 마을에서 평화가 시작된다. 심판은 무너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살아갈 자리를 남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며 사는가? 성공한 사람의 말은 오래 기록하면서, 밀려난 사람의 침묵은 너무 쉽게 지우고 있지 않은가? 가장 크게 들리는 목소리를 진실이라 믿는 동안, 낮은 곳의 신음은 점점 들리지 않게 된다.

    미가서는 우리를 성경 안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문지방에 세워, 먼저 낮은 곳의 소리를 듣게 한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미 1:2).

    비어 있는 집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밭은 그 자리에 있고, 전쟁이 지나간 골짜기에는 아직 이름들이 남아 있다. 아무 말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한 인생의 서문도, 오래 외면한 목소리 앞에 멈추는 순간 다시 쓰이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많이 말한 삶보다 오래 들은 삶이 남는다. 높이 오른 삶보다, 빼앗긴 자리 앞에 멈추어 선 삶이 남는다.

    그리고 아직 내 손에 칼이 남아 있다면.

    그 칼은 언제 밭을 배우게 될까?

     

    ※ 최근 미가 연구는 이 책을 단순히 불의를 꾸짖는 사회정의의 예언서로만 읽지 않는다. 제임스 노갈스키의 최근 주석은 미가서의 오래된 예언 전승과 후대의 형성 과정이 한 책 안에서 어떻게 심판과 희망의 긴장을 이루는지 살핀다. 오늘의 연구는 권력 남용과 토지 문제 같은 사회경제적 현실뿐 아니라, 열방을 향한 평화의 비전과 <열두 예언서> 안에서 미가서가 차지하는 자리까지 함께 읽는다. 그렇게 보면 미가서는 빼앗긴 땅을 고발하는 책이면서, 바로 그 땅에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책이다.

    미가서의 문장

    정의는 빼앗긴 자리를 돌려주고, 평화는 그 자리에 다시 씨를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