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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입술, 입맞춤에서 인장까지 (뉴스앤조이) 202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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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회   작성일Date 26-06-12 17:45

    본문

    입술, 입맞춤에서 인장까지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아가 1:1–4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사랑은 마음에 오래 숨어 있지 못하고 먼저 입술에서 들킨다.

    해 질 무렵의 포도원엔 낮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돌담은 사람의 체온처럼 미지근하고 잎사귀 사이로는 풋포도의 떫은 향이 번진다. 발밑의 흙은 서걱이고, 오래 햇빛을 머금은 공기에는 마른 먼지의 맛이 감돈다. 

    바로 그 저녁의 고요를 가만히 깨우며, 한 여인이 먼저 사랑을 입 밖에 낸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 

    이보다 뜻밖의 시작이 또 있을까? 성경의 문은 흔히 태초와 부르심과 환상과 탄식으로 열린다. 그런데 아가서는 입술로 열린다. 교리보다 먼저 떨리고, 설명보다 먼저 뜨거워지는 한 존재의 떨림으로 문을 연다.

    이 낯선 입술의 시작은 성경에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낯섦 때문에 아가서는 성경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계명만이 아니라 향기와 포도주와 기다림, 이름 하나로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가 모든 수고 끝에 손에 남는 것이 안개뿐임을 보여 주었다면, 아가서는 그 흩어짐 한가운데서도 끝내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에게 이르게 하는 사랑의 힘을 들려준다.

    첫 네 절은 아가서 전체의 씨앗이다. 입맞춤과 향기와 이름, 그리고 “따라 달려가리라”는 한마디 속에 이 책의 설렘과 기다림과 헤맴이 이미 접혀 있다. 처음의 입술은 끝내 마음과 팔에 찍힌 도장이 되고(아 8:6), 사랑은 닫힌 정원과 밤길의 찾음을 지나(아 4:12; 3:1-4; 5:6-8) 마침내 죽음같이 강한 불로 자란다.

    입술은 사랑이 처음 몸을 얻는 자리다. 사랑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부르고 찾아가고, 끝내 돌아서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아가서의 사랑은 처음에는 한 번의 부름에서 시작되지만, 끝내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밝히는 불이 된다. 

     

    입술이 먼저 열렸다

    아가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노래로 건넨다. “솔로몬의 아가라”(아 1:1). 이 책의 첫 단어는 ‘쉬르’, 곧 노래다. 아가서는 사랑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노래한다. 성전의 지성소가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이라면, 아가서는 노래들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놓인 노래다.

    이 노래의 첫 숨은 왕의 입술이 아니라 한 여인의 입술에서 나온다. 표제 다음에 들려오는 것은 명령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사랑을 해설하는 교훈도 아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

    성경 한복판에서 한 여인이 먼저 사랑을 말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사랑은 여기서 기다리는 침묵이 아니라, 먼저 입을 여는 목소리로 시작된다. 아가서는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는 여인이 아니라, 사랑을 부르는 여인의 입술로 문을 연다.

    그래서 아가서의 문지방에는 자유가 있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라 끌림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끌림은 폭력이 아니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여기서 따라감은 굴복이 아니고, 이끌림은 지배가 아니다. 사랑은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서로의 숨을 빼앗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자주 소유의 언어로 망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열기보다 가두고, 가까이 가기보다 움켜쥔다. 붙잡는 순간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다정함의 얼굴을 빌린 지배다. 그때 몸은 존귀를 잃고 물건이 되며, 갈망은 서로를 살리는 불이 아니라 한쪽을 태우는 불로 기운다.

    그러나 아가서는 사랑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의 입맞춤은 몸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몸을 결코 낮추지 않는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되, 그의 숨과 떨림을 존중하며 다가가는 일이다. 그래서 몸은 욕망의 껍데기가 아니라 사랑이 깃드는 자리다.

    아가서는 사랑을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놓는다. 사람을 끝내 살리는 것은 더 많이 쥐는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한 사람으로 불러 주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름을 향기처럼 품고 곁에 머무는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에 끝까지 남는 것은 손에 쥔 것이 아니라, 끝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의 이름이다.

    사랑은 마음속에 갇혀 있을 때 아직 사랑이 아니다. 향기처럼 스미고 이름처럼 불리며 타인에게 건너갈 때, 비로소 사랑은 제 얼굴을 얻는다. 그래서 아가서의 첫 장은 한 여인의 입술에서 시작해 책 전체를 부름과 기다림과 찾음의 노래로 연다. 사랑은 먼저 말하는 용기에서 태어나고, 그 먼저 열린 입술은 끝내 한 사람의 이름을 향해 간다. 

     

    이름은 향기가 된다

    여인은 말한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포도주는 사람을 잠시 달아오르게 하지만, 사랑은 한 사람의 세계를 오래 바꾸어 놓는다. 아가서의 사랑은 사람을 취하게 해 현실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뎌진 눈을 다시 열어, 같은 길과 같은 계절마저 새롭게 보게 한다.

    사랑이 오면 세계는 다시 향기를 얻는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쏟은 향기름” 같아(아 1:3) 오래 머물고 넓게 번진다. 이름은 보이지 않아도 말투와 손길과 눈빛과 기다림 속에 스며, 한 사람의 세계를 천천히 바꾸어 놓는다.

    성경에서 이름은 꼬리표가 아니다. 이름은 그 사람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를 숫자나 기능으로 줄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랑은 끝내 이름을 지우지 않고, 한 사람을 다시 한 사람으로 불러 세운다.

    아가서가 오늘 다시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보다 프로필을 먼저 읽고, 얼굴보다 이미지를 먼저 소비하며, 관계마저 숫자로 세는 시대를 산다. 몸은 전시되고, 사람은 너무 쉽게 대체된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속도로 얻지 않는다. 사랑은 대체 가능한 하나를 더하지 않고, 끝내 한 사람 앞에 멈추어 선다.

    그래서 아가서의 사랑은 감각적이지만 얕지 않다. 이 책은 몸을 말하되 몸을 욕망의 껍데기로 낮추지 않는다. 여인은 말한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아 1:5). 

    햇볕에 그을린 살갗과 노동의 흔적, 타인의 시선 앞에서 움츠러든 마음이 그 한마디에 함께 배어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지우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흠 없는 상품으로 바꾸지 않는다. 사랑은 상처 입은 몸 안에서도 끝내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바로 여기서 아가서는 오늘의 사람을 깊이 위로한다. 우리는 자기 몸과 쉽게 화해하지 못한다. 더 젊고, 더 마르고, 더 매끈해야 한다는 시선 아래 오래 시달린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 상처 입은 자리 위에 다른 말을 얹는다.

    “검으나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흠 없는 표면에 있지 않고, 끝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의 깊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가서가 인간 연애의 낭만으로만 닫히는 것은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오래도록 이 노래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읽어 왔다(엡 5:31-32). 그러나 아가서를 서둘러 알레고리로만 올려 버리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사랑의 선함이 흐려진다. 반대로 인간 사랑의 노래로만 붙들면, 그 사랑 너머로 열리는 하나님의 신비가 얕아진다. 아가서는 둘 가운데 하나를 버리라 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사랑이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열릴 수 있음을, 이 책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끝내 보여 준다.

    영혼은 몸을 버리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을 품은 채 깊어진다. 향기는 보이지 않아도 머문 자리를 바꾸고, 사랑은 붙잡히지 않아도 한 사람의 세계를 끝내 바꾸어 놓는다.

     

    사랑은 달려간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아가서의 사랑은 가만히 머물지 않는다. 끌리고, 따라가고, 달려간다. 한 사람은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부름을 따라 길을 나선다. 밤은 더 이상 닫힌 시간이 아니고, 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다. 사랑은 잃어버린 이를 찾아 헤매게 하고, 멈춘 자리를 다시 길로 바꾸어 놓는다(아 3:1-4; 5:6-8).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한 번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아가서의 달려감은 조급함이 아니다. 이 책의 사랑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식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를 앞질러 빼앗지 않고, 그의 걸음에 제 숨을 맞춘다. 그래서 아가서는 여러 번 말한다.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3:5; 8:4). 참된 사랑은 빨리 차지하는 힘이 아니라, 제때를 기다릴 줄 아는 불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아 8:6-7). 아가서의 사랑은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불이다. 첫 장의 입맞춤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고, 처음의 갈망은 끝내 마음과 팔에 새겨진 도장이 된다. 사랑은 입술에서 시작되지만, 마침내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다.

    아가서를 읽는다는 것은 사랑을 처음 배우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사랑의 얼굴을 다시 알아보는 일이다. 사랑은 쉽게 차지하는 힘이 아니라 오래 품는 인내이고, 손에 움켜쥐는 소유가 아니라 마음과 팔에 새겨지는 인장이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아 8:6). 끝내 사람을 살리는 사랑은 붙드는 사랑이 아니라 새겨지는 사랑이다.

    결국 사람의 인생에 끝까지 남는 것은 많이 가졌던 순간이 아니라, 끝내 품고 놓지 못했던 한 사람, 한 이름, 한 사랑이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또렷해진다.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 계시기에(요 13:1), 우리도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덮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 것은 끝내 한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그리움이다.

     

    ※ 아가서는 오래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노래한 책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연구는 이 책을 먼저 인간 사랑의 시, 곧 몸과 감각과 상호 갈망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지혜문학으로 읽는다. 오늘날에는 이 두 흐름이 함께 논의되며, 아가서 1장 1–4절을 단순한 연애시의 도입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이름과 갈망을 통해 창조 세계의 선함을 다시 열어 보이는 문지방으로 읽게 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