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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강가, 포로의 강가에서 열린 하늘 (뉴스앤조이) 2026-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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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6-07-25 19:03

    본문

    강가, 포로의 강가에서 열린 하늘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에스겔 1:1-3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강가의 아침은 아직 말이 없었고, 물기만 먼저 깨어 있었다. 물은 어둡게 엎드려 있었고, 갈대들은 밤새 젖은 몸을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흙은 발밑에서 조금씩 무너졌고, 강 건너편의 낮은 안개는 돌아갈 곳을 잃은 이름처럼 희게 떠 있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나왔다. 누구도 먼저 고향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르면 더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젊은 제사장이 있었다. 그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향이 배어야 할 옷자락에는 강가의 습기가 스며 있었고, 제단의 불을 익혀야 할 눈에는 낯선 물결의 희미한 번들거림이 들어와 있었다. 예루살렘의 뜰을 밟아야 할 발은 바벨론의 젖은 흙 위에 놓여 있었다.

    강물은 계속 흘렀다. 그러나 그 물은 요단강이 아니었다. 순례자의 발목을 씻기던 물도, 시편의 노래가 스며 있던 물도 아니었다. 제국이 파 놓은 운하였고, 포로들의 땀과 먼지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인 물길이었다. 물은 흐르는데,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에스겔서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강가. 사로잡힌 사람들. 말라붙은 입술과 젖은 흙.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이 짧은 문장 안에 한 책의 상처가 접혀 있다. 접힌 채 오래 눌려 있던 종이처럼, 펴면 그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 상처다.

    에스겔은 끌려간 사람들 곁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성전의 돌과 제단의 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물소리와 침묵이 서로를 갉아먹는 강가에 서 있다. 하나님이 계신 곳과 사람이 버려진 곳이 서로 다른 곳처럼 보이는 자리. 바로 거기서 이 책은 열린다.

    이 첫 장면은 에스겔서 전체를 미리 비춘다. 이 책은 무너진 성전과 흩어진 백성, 닫힌 현실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떠나시고, 말씀하시고, 다시 돌아오시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겔 10:18-19), 마른 뼈들이 숨을 얻고(겔 37:1-10), 돌 같은 마음 대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지고(겔 36:26-27), 마지막에는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죽은 곳을 살린다(겔 47:1-12). 에스겔 전체가 이 첫 강가 안에 이미 고여 있다.

    예레미야애가가 무너진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울었다면, 에스겔서는 멀리 떠밀려온 강가에서 하늘을 본다. 애가가 “어찌하여”라고 묻는 자리에서, 에스겔은 설명할 수 없는 장면 앞에 선다.

    하늘이 열린다.

    그 닫힌 세계 위로 하늘이 열린다. 폐허 위로, 포로들의 숙인 머리 위로, 제국의 강가에 고인 습한 공기 위로. 땅에서는 문이 닫혔다. 고향으로 가는 길도, 성전으로 돌아가는 길도 닫혔다. 그러나 하늘은 닫히지 않았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것이 에스겔서의 첫 충격이며, 책 전체를 관통하는 첫 복음이다.

    그래서 에스겔서의 문지방은 임재다. 성전이 아니라 강가에서, 중심이 아니라 밀려난 자리에서, 자유인이 아니라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이 책은 처음부터 한 가지 질문을 오래 붙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성전이 흔들릴 때, 나라가 무너질 때, 고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낯선 물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밤에도, 하나님은 아직 거기 계신가?

    에스겔서의 마지막 이름은 “여호와 삼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겔 48:35).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자리, 하나님은 그곳을 당신의 이름으로 남기신다. 그 이름은 책 끝에 붙은 결론이 아니라, 이미 첫 장의 강가에서 시작된 대답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에야 겨우 돌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포로의 첫 문지방에서부터 젖은 흙과 침묵과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 와 계신 분이다.


    하늘이 열린 자리

    에스겔은 서른째 해에 그 환상을 본다. 서른. 제사장에게는 몸이 성전의 리듬을 익혀 가야 할 나이였다. 제단의 냄새, 성소의 침묵, 제사장의 발걸음. 그것들이 그의 삶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서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포로의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준비한 자리에서 부름 받기를 바란다. 배운 대로 쓰임 받고, 기다린 곳에서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부름은 낯선 자리에서 온다.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곳이 멀어졌을 때, 있을 리 없다고 여긴 곳에서 하늘이 열린다.

    그발 강가는 에스겔에게 실패의 장소였다. 한 민족의 패배가 흘러드는 물가였고, 성전 없는 제사장의 무력함이 고인 자리였다.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제단에서 멀어졌고, 말씀을 맡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공동체는 흩어져 있었다. 고향은 기억 속에 있었고, 현실은 제국의 땅이었다. 그의 몸은 살아남았지만, 소명은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늘이 열린다. 에스겔서는 고통을 지우고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포로의 강가를 건너뛰어 영광으로 달려가지도 않는다. 가장 먼저 그 장소를 적는다.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이 책은 상처의 주소를 지우지 않는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자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이것이 에스겔서의 첫 신학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안전한 중심보다 넓다. 하나님은 성전 깊은 곳에서만이 아니라 포로의 강가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루살렘의 돌담을 넘어, 제국의 물가에 앉은 사람들 곁으로 오신다. 밀려난 사람들 사이에 서시고, 무너진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당신의 무게를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에스겔 1장은 성전이 흔들린 시대에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지방이다.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으시고, 고향에서 밀려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장소보다 하나님의 임재는 넓고, 우리가 닫혔다고 생각한 문보다 하나님의 하늘은 깊다.

    오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발 강가에 앉는다. 전쟁과 이주, 가난과 추방, 서류 한 장의 불안과 낯선 언어의 피로 속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밀려난다. 고향을 떠났으나 새 땅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 일터와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자기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에스겔은 먼 고대의 환상가가 아니다. 삶의 중심이 흔들릴 때 하나님을 어디서 다시 만나야 하는지, 무너진 현실을 어떻게 끝이 아니라 문지방으로 읽어야 하는지 묻게 하는 동시대의 증언자다. 

    에스겔서는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괜찮다고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한 장면을 보여 준다.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하늘이 열렸다고. 성전의 문이 닫힌 것 같은 날에도, 하늘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고.


    바퀴 달린 영광

    에스겔이 본 것은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바람이 몰려오고, 큰 구름이 다가오고, 불이 번쩍였다. 그 불 한가운데서 무엇인가 살아 움직였고, 곁에는 바퀴가 있었다. 바퀴 안의 바퀴. 눈앞에 있으나 붙잡히지 않고, 물러서도 사라지지 않는 환상. 에스겔의 첫 환상은 무너진 사람을 달래기보다, 무너진 세계를 다시 흔들어 깨운다.

    그 환상의 중심에는 영광이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바퀴는 돌이키지 않고, 영이 가려는 곳으로 향한다. 사람의 길을 따르지 않고, 제국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 성전 깊은 곳에만 계실 것 같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의 돌담을 넘어, 낯선 땅의 습한 공기 속으로 온다. 에스겔이 본 임재는 멈춰 있는 거룩이 아니라, 포로의 강가까지 찾아가는 거룩이다.

    이 움직이는 영광이 에스겔서의 심장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곳에 두고 싶어 한다. 성전 안에, 전통 안에, 좋았던 시절의 기억 안에. 그러나 에스겔이 본 하나님은 사람의 손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떠나시고, 찾아오시고, 드러내시고, 다시 세우신다. 그 움직임은 위로이며, 동시에 경고다.

    에스겔서에서 임재는 값싼 안정감보다 깊다. 하나님의 영광은 포로들의 상처를 품고, 예루살렘의 죄를 드러낸다. 성전도, 하나님의 이름도, 거룩하지 않은 삶을 대신해 주지 못한다. 임재는 품어 주는 빛이면서, 숨겨 둔 것을 드러내는 불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불편한 예언자다. 그는 폐허 위에 부드러운 천을 덮지 않는다. 무너진 원인을 묻고, 거짓 평안을 찢으며, 성전 안쪽에 숨은 폭력과 우상을 드러낸다. 그의 언어는 거칠고, 환상은 낯설며,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재난 이후의 공동체에는 그런 말이 필요하다. 너무 빠른 위로는 상처의 뿌리까지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의 임재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위로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위로만 남으면 책임을 잃고, 심판만 남으면 숨을 잃는다. 에스겔서는 그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까이 오셔서 살리시고, 그 가까움으로 숨겨진 것을 드러내신다. 

    그 복선은 이미 첫 장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1:3). 말씀과 권능. 들려오는 음성과 붙드시는 손. 에스겔은 자기 안에서 환상을 짜낸 사람이 아니다. 포로의 현실을 뚫고 말씀이 왔고,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었다. 그는 낙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붙들렸기 때문에 말한다.

    에스겔서에서 영은 그를 들어 올린다. 옮기고, 보게 하고, 말하게 한다. 마른 뼈의 골짜기로 데려가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운다. 그러나 영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현실을 더 깊이 보게 하는 힘이다. 뼈가 뼈인 것을 보게 하고, 죽음이 죽음인 것을 말하게 하며, 그 죽음 앞에서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3)는 하나님의 질문을 듣게 한다.

    우리는 현실과 환상을 자주 갈라놓는다. 현실적인 사람은 환상을 버리고, 환상적인 사람은 현실을 외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스겔에게 환상은 현실을 피하는 길이 아니다.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그는 포로의 강가에서 하늘을 보고,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생기를 본다.

    움직이는 영광은 우리에게도 묻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에 묶어 두었는가? 예배당 안에, 성공의 기억 안에, 익숙한 언어와 안전한 사람들 사이에 가두어 두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떠밀려 간 자리에도 계신가? 타인의 강가에도 계신가? 실패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하늘은 열릴 수 있는가?

    우리에게 에스겔의 환상은 현실을 피하는 신비 체험이 아니다. 현실이 전부라는 체념을 깨뜨리는 낯선 빛이다. 바퀴 달린 영광은 말한다. 하나님은 갇히지 않으신다. 성전의 문이 닫히고 나라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도, 포로의 강가에 앉은 사람들 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마른 뼈의 숨

    에스겔서가 오래 읽히는 까닭은 절망을 얕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너진 도시를 서둘러 복구하지 않고, 포로의 시간을 잠시 지나갈 불편으로 줄이지도 않는다. 죽음을 그대로 응시한다.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하고, 그 뼈들은 심히 말라 있다. 회복의 말은 그 정직함 위에서 시작된다.

    마른 뼈의 환상은 에스겔서의 회복이 단순한 귀향을 넘어섬을 보여 준다. 장소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 안에 다시 마음이 살아야 한다. 돌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져야 한다(겔 36:26-27). 흩어진 백성이 모이는 것보다 더 깊은 회복은, 굳은 마음이 다시 느끼고, 마른 몸이 다시 숨 쉬며,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아 있는 백성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른 뼈의 골짜기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 창조의 문턱이다.

    그 생기는 마침내 물이 된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환상은 성전이다. 그러나 그 성전은 과거의 복원이 아니다. 문지방에서 시작된 작은 물이 깊어져 강이 되고, 닿는 곳마다 생명을 살린다. 죽은 바다도 살아나고, 나무들은 철마다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겔 47:1-12). 임재는 닫힌 방이 아니라, 흘러가며 살리는 생명이다.

    에스겔의 처음과 끝은 서로를 비춘다. 처음에는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끝에는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흐른다. 문지방에서 포로들이 낯선 물가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시작된 질문은, 마지막에 한 이름으로 대답된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겔 48:35).

    그러므로 에스겔서의 시작은 책 전체가 지나가야 할 문지방이다. 심판에서 회복으로, 떠남에서 돌아옴으로, 폐허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 이미 첫 강가에 고여 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마지막 이름은 그 강가를 다시 보게 한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면, 버려진 곳은 어디인가? 아직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세계는 마른 뼈의 소리를 안다. 전쟁 뒤 무너진 집, 국경 앞에 길어진 줄, 이름보다 번호로 불리는 사람들, 오래된 이민 생활 속에서 말라 가는 마음들. 공동체 안에도 마른 뼈는 있다. 오래 예배했지만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마음, 상처를 입고도 말할 언어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에스겔서는 난해한 예언서에 머물지 않는다. 무너짐 이후에도 하나님이 사람과 공동체를 어떻게 다시 숨 쉬게 하시는지 보여 주는 책이다. 에스겔서가 말하는 생기는 감정의 고양도, 잠깐의 열기도 아니다. 사람이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숨이다.

    사람은 뼈를 모을 수는 있어도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다. 제도를 만들고, 건물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준비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깊은 곳에 새 영을 넣을 수는 없다. 회복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무너진 것을 세우시고, 마른 것을 숨 쉬게 하시며, 죽은 바다에 물길을 내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그러나 사람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에스겔은 보아야 했고, 들어야 했고, 말해야 했다. 그는 살릴 수 없지만 말씀을 대언할 수 있었다. 생기를 만들 수 없지만, 생기를 향해 입을 열 수 있었다. 신앙은 때로 내가 살릴 수 없는 것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리다.

    에스겔서의 문지방은 우리를 그 자리로 데려간다. 하늘이 닫혔다고 생각한 사람, 더 이상 성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낀 사람에게 이 책은 말한다. 하늘은 네가 잃어버린 장소보다 높고, 하나님의 임재는 네가 빼앗긴 자리보다 깊다고.

    한 인생의 서문도 그렇게 열릴 수 있다. 실패라고 부른 곳에서 하늘이 열리고, 끝이라고 생각한 날에 말씀이 임할 수 있다. 에스겔은 그 한 장면을 남긴다.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 낯선 강가에서, 하늘이 열렸다.

    그 장면이 책 전체를 다시 열어 준다. 영광은 움직이고, 영은 들어 올리며, 말씀은 마른 뼈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성전이 멀어져도 하나님은 멀어지지 않으시고, 고향을 잃어도 임재를 잃은 것은 아니다. 강가에서 열린 하늘은 마침내 생명의 강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에스겔서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가두어 둔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다. 버려졌다고 단정한 강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내 안의 마른 뼈 앞에서도 생기를 말할 수 있는지 묻는 일이다. 에스겔서는 우리를 그 질문 앞에 세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직 생기가 불 수 있다고. 아직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고.

    지금 내 삶의 그발 강가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서 다시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 에스겔서는 오랫동안 난해한 환상과 상징 행동, 성전 환상의 책으로 읽혀 왔다. 월터 짐멀리와 모세 그린버그는 이 책을 포로기의 역사, 제사장적 신학, 문학적 통일성 안에서 읽는 중요한 길을 열었다. 최근 연구는 여기에 더해 에스겔서를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문서, 제국 속 정체성 재구성의 기록, 트라우마 이후의 언어로 확장해 읽는다. 그렇게 보면 에스겔 1장은 한 예언자의 신비 체험을 넘어, 삶의 중심을 잃은 공동체가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 첫 문지방이다.

     

    에스겔의 문장

    하나님은 밀려난 곳에 계신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