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까닭, 까닭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가 (뉴스앤조이) 202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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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까닭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욥기 1:1-12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흠 없는 아침의 균열
그날 아침, 재앙은 아직 문밖에 서 있었다. 우스 땅의 빛은 평소처럼 먼지를 지나 들판 위에 내려앉고, 양 떼는 고요히 풀을 뜯고, 낙타의 긴 그림자는 마른 지평선 위로 느리게 눕는다. 집 안에서는 자녀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고, 집 밖에서는 종들이 정해진 일과를 수행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너무 흠이 없어, 오히려 금이 갈 것 같은 아침이다.
그 풍경 한가운데, 성경은 한 사람을 세운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왕의 이름도, 전쟁의 함성도, 제국의 흥망도 먼저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일상이다. 그저 그 작은 문틈 사이로 인간이 끝내 피하고 싶어 하는 질문 하나가 스며든다.
흠 없이 살아온 사람의 집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밤이 들이닥칠 수 있는가?
우스는 성경의 중심지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약속의 땅 한복판도 아니다. 지도 위에서 쉽게 붙잡히지 않는 경계 바깥의 땅이다. 성경은 인간 고난의 가장 깊은 질문을 익숙한 성소 안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언어가 낯설게 울리는 땅, 한 사람의 삶이 외롭게 놓인 자리에서 그 질문을 더 또렷하게 세운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들판에는 양과 낙타와 소와 암나귀가 가득하다. 그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혹시 머물렀을지 모를 작은 죄마저 염려하며 번제를 드린다. 그의 삶은 단정하게 가꾼 정원 같고, 신앙은 그 정원을 감싸는 견고한 담벼락 같다.
그러나 욥기의 첫 장은 이 평안을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단정한 정원 한가운데 곧 닥쳐올 균열의 자리를 남겨 둔다. 성경은 욥을 먼저 의인으로 세운다. 그래야 우리는 그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무언가 잘못했겠지. 숨겨진 죄가 있었겠지. 욥기의 서문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이 인과응보의 회로를 이렇게 멈춰 세운다.
욥은 죄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의 문지방에서 그 길은 이미 막혀 있다. 하나님도 그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욥기의 질문은 처음부터 단순한 인과의 문제가 아니다.
왜 의인도 무너지는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설명되지 않는 밤을 통과해야 하는가? 울타리가 사라진 뒤에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 첫 장 안에는 이미 욥기 전체의 숲이 희미하게 들어 있다. 의인의 집은 곧 잿더미가 되고, 하늘의 질문은 땅의 긴 논쟁으로 번져 간다. 친구들은 질서의 언어로 욥을 설득하고, 욥은 상처의 언어로 하나님께 항변한다. 마침내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지만, 이야기는 처음의 안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욥은 더 많은 것을 돌려받은 사람이기 전에, 더 깊은 질문을 통과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 서문은 단순한 사건의 시작이 아니다. 의인의 집은 곧 흔들리고, 하늘의 회의는 땅의 고난으로 번지며, 까닭 없는 질문은 무너질 울타리 앞에서 인간의 말을 시험한다. 욥기의 모든 길은 이 문지방에서 이미 열리고 있다.
우리는 성과와 보상, 노력과 결과, 책임과 원인을 촘촘히 연결하는 시대를 산다. 그러나 욥기의 문지방은 묻는다. 정말 모든 고통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이 빠를수록 사람의 얼굴은 더 빨리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사람은 묻는다. 왜 하필 그 사람인가. 왜 하필 나인가. 왜 지금인가.
욥기의 첫 장은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놓는다. 그러나 서둘러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답의 속도를 늦춘다. 욥의 고난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욥의 의로움을 말한다. 고통 앞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답을 너무 빨리 가진 사람이다.
하늘이 물은 까닭
장면은 땅에서 하늘로 옮겨 간다. 우스 땅의 들판과 집과 자녀들의 잔치 너머, 보이지 않는 천상의 회의가 열린다. 땅에서는 욥의 집이 보였고, 하늘에서는 욥의 이름이 다시 불린다. 한 사람의 삶은 땅에서만 해석되지 않는다. 보이는 일상 뒤편에는 보이지 않는 질문이 있다.
여기서 사탄은 ‘하사탄’, 곧 고발자에 가깝다. 그는 인간 신앙의 진정성을 집요하게 의심하는 검사역이다. 경건을 순수한 사랑으로 보지 않고, 이익과 보상의 거래로 읽어 내는 자다. 그가 하나님께 던진 질문은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날카로운 물음이 된다. 거래인가, 사랑인가. 욥기의 하늘은 바로 그 질문을 땅 위의 한 사람에게 묻는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여기서 ‘까닭 없이’가 중요하다. 히브리어 ‘힌남’은 이유 없이, 대가 없이, 거저라는 뜻을 품는다. 사탄의 고발은 날카롭다. 욥이 사랑한 것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둘러 주신 울타리인가. 울타리가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랑은 남을 수 있는가. 복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도 이 울타리는 낯설지 않다. 건강, 재정, 자녀의 안전과 성공.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그분이 둘러 주신 울타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더 간절히 바랄 때가 있다. 그것을 은혜라 부르지만, 때로 그 은혜의 이름 아래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안전일 수 있다. 욥기의 질문은 바로 그 안락함을 겨눈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인가. 사랑인가, 거래인가.
욥기는 이 ‘까닭’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42장까지 긴 항해를 시작한다. 친구들은 끝까지 그 까닭을 찾아내려 한다. 고난에는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은 욥의 죄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세상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욥은 그 편리한 해석을 거부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거짓 까닭으로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느니,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씨름하기를 택한다. 욥은 순응하는 의인이기보다, 하나님과의 대면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복이 신앙의 열매일 수는 있다. 그러나 복이 신앙의 이유가 되는 순간, 사랑은 계산이 된다. 욥기의 서문은 이 불편한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이 시험을 허락하셨는지도 쉽게 해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욥기는 설명되지 않는 고난 앞에서 인간의 언어가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를 보여 준다. 뒤이어 펼쳐질 긴 논쟁은 모두 이 질문의 변주다. 욥은 무엇을 잃고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욥은 처음에는 침묵하고, 나중에는 말한다. 친구들의 말은 많아지지만, 그 말은 점점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오래 침묵하시다가 폭풍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도 “네 고난의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답하지 않으신다.
욥기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질문이 하나님보다 커지지는 않는다.
잿더미 곁의 언어
울타리는 무너졌다. 자녀도, 재산도, 건강도 사라졌다. 욥은 이제 단정하게 정돈된 정원이 아니라 잿더미 위에 앉아 있다. 욥기의 언어는 이 자리에서 깊어진다. 잠언이 대체로 뿌린 대로 거두는 질서의 언어를 말한다면, 욥기는 그 질서가 박살 난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의 언어를 기록한다.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까닭’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계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난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은 욥의 불의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서 있는 안전한 세계가 위협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기의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친구들이 내놓는 옳아 보이는 말들이 고통받는 욥에게는 도리어 칼이 된다.
우리 시대도 너무 빨리 답을 내놓는다. 실패에는 부족한 노력이 있고, 질병에는 관리의 소홀함이 있다고 말한다. 때로 원인을 밝히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분석하려는 순간,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은 사라진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라는 질문은 때로 위로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욥기의 서문은 그런 우리의 입을 막는다. 욥의 고난에는 땅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잿더미에 앉은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다.
곁이다. 침묵이다. 얼굴을 보는 일이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잘했다. 멀리서 욥을 보고 울었고, 옷을 찢었고, 티끌을 머리에 뿌렸고, 칠 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생겼다. 침묵이 끝나자, 설명이 욥을 덮었다.
오늘 우리가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고난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고난 곁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설명보다 곁이 먼저이고, 판단보다 눈물이 먼저다. 욥기의 긴 논쟁은 결국 언어의 시험대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멈추고, 어떤 침묵을 지킬 것인가.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히 순응하지도 않는다. 그는 탄식하고, 항의하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답을 요구한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런 욥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마지막에 친구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의 말은 거칠었고, 친구들의 말은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련된 정답보다 투박한 진실을 더 가까이 두신다.
마침내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나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땅의 기초와 바다의 경계, 새벽의 자리와 산염소의 출산, 까마귀 새끼와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세계를 펼쳐 보이신다. 그것은 욥의 질문을 묵살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까닭이라는 좁은 그릇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광활한 세계 앞에 욥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욥은 이유를 알아내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이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섰기에 더 깊은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욥기의 서문은 고난의 시작만이 아니라 언어의 시험이기도 하다.
까닭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까닭으로만 붙들려 할 때, 우리는 신비를 잃고 사람을 잃고 하나님마저 잃는다. 욥기는 더 깊은 곳에서 묻는다. 울타리가 무너지고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말할 수 있는가.
욥기의 첫 장은 우리를 잿더미로 밀어 넣지 않는다. 다만 잿더미에 앉은 사람을 함부로 해석하지 못하게 한다. 너무 많은 말이 너무 빨리 쏟아지는 시대에, 욥기는 더 천천히 보라고 한다. 고난당한 사람의 삶을 교훈의 재료로 삼기 전에, 그 곁에 먼저 앉으라고 한다.
그러므로 욥기의 문지방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품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상처들을 안고, 성경의 첫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곁에서, 성경은 오늘도 묻는다.
너는 까닭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가?
※ 욥기는 오래도록 ‘인내하는 의인’의 이야기이자, 무고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책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현대 성서학은 욥기를 단순한 인내의 교과서로만 보지 않는다. 캐럴 뉴섬은 욥기를 여러 목소리가 충돌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다성적 문학으로 읽고, 에드워드 그린스타인은 욥을 순응하는 의인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끝까지 진실을 요구하는 인물로 본다. 이런 흐름에서 욥기 1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우스 땅은 이 질문이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온전하고 정직한” 욥은 고난을 죄의 결과로만 설명하려는 언어를 처음부터 흔든다. 하늘 회의와 “까닭 없이”라는 질문은 신앙이 보상과 거래의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울타리가 사라진 뒤에도 믿음이 남을 수 있는가. 욥기의 문지방은 우리를 익숙한 위로의 방에서 나와, 신비와 질문이 기다리는 거친 들판 앞에 세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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