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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귀환, 제국을 지나, 하나님께로 (뉴스앤조이) 202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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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회   작성일Date 26-04-24 18:26

    본문

    귀환, 제국을 지나,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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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에스라 1:1-11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11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페르시아의 서고, 깊은 밤의 적막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펼쳐진다. 봉인의 자국, 마른 갈대 펜의 잉크, 제국의 인장이 눌린 문서.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은 멀다. 성전은 재 속에 묻혀 있고, 성벽은 무너진 채 바람만 통과시킨다. 돌아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없다.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폐허의 언덕이 아니라 제국의 서고에서. 무너진 돌무더기가 아니라 칙령에서. 잿빛 새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서 막 펼쳐진 두루마리 한 장에서.

    이 시작이 뜻밖으로 읽히는 까닭은 선연하다. 멸망 이후 사람들은 보통 잿더미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책은 문서부터 보여 주기 때문이다. 눈물보다 먼저 문장이 나오고, 귀향의 꿈보다 먼저 제국의 명령이 앞에 놓인다. 귀환은 그렇게, 가장 차갑고 건조한 자리에서 문을 연다.

    그런데 첫 절은 곧 그 표면을 뚫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여호와께서 …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1절) 눈앞에 놓인 것은 왕의 칙령이지만, 그 문장 아래에는 더 오래된 약속이 흐른다. 제국의 문서처럼 보이던 첫 장면이 실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열리고 있음을, 이 첫 절은 낮고 깊은 빛으로 비쳐 준다.

    귀환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다. 정치의 변화 속으로 약속이 다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다. 제국의 시간표 안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다시 스며드는 순간이다. 그 귀환은 막연한 감동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성전의 그릇들은 하나하나 헤아려지고, 세스바살의 손에 맡겨져,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실제로 들려 올라간다. 귀환은 상징에 그치지 않는, 손에 잡히는 사건이다.

    이 시작은 홀로 서 있지 않다. 히브리 성경에서 역대기의 마지막 문장은 거의 그대로 이 책의 첫 문장이 된다(대하 36:22–23). 한 권의 마지막 숨이 다른 한 권의 첫 호흡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니 귀환은 느닷없이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래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으로 읽힌다.

    문득 서고의 어둠 한가운데서 한 가지 물음이 번뜩인다. 지금 열리는 것은 제국이 허락한 출구인가, 아니면 오래 잠겨 있던 약속의 시간을 하나님이 다시 여시는 문인가. 에스라서는 바로 그 갈라지는 빛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누가 문을 여는가

    왜 에스라서는 칙령으로 문을 여는가. 포로를 지나온 공동체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이 감상이 아니라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전의 재를 바라보며 울기만 해서는 다시 백성이 될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 폐허 위에 하나의 문장을 세워야 했다. 지금 일어난 일이 단지 제국의 정책이 아니라, 오래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귀환이라고.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제국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상처의 의미까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전의 재는 여전히 차갑고, 흩어진 사람들의 삶도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잿더미 곁에 서서 물어야 했다.

    이것은 우연인가. 제국의 관용인가. 아니면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하나님의 귀환인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이라는 정치의 시간 위에, 예레미야의 말씀이 성취되는 더 깊은 시간을 포갠다. 역사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마지막 해석권을 제국에 내주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왕의 조서이지만, 그 문장의 밑바닥에는 더 오래된 약속이 흐른다.

    실제로 페르시아는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남긴 강제이주의 기억과는 다른 얼굴로 제국을 운영했다. 그들은 무너진 성소를 다시 세우게 하고, 흩어진 민족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방식을 제국의 질서로 삼았다. 끌고 와 흩어 놓는 것으로 세계를 다스리던 시대 한복판에서, 되돌려 보내고 다시 세우는 통치의 문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 시대를 비추어 주는 고대 자료도 남아 있다. 이른바 고레스 원통문이다. 점토 원통의 표면에 빽빽이 새겨진 그 문장은, 제국이 스스로를 어떤 얼굴로 기억시키고 싶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자화상에 가깝다. 그 안에는 여러 민족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오래 폐허가 된 성소들을 다시 일으키게 했다는 자부심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제국은 자기 손으로 문을 열었다고 기록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은 주어를 묻는다. 누가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누가 이 문을 열었는가.

    세상은 그것을 제국의 관용으로 적어 두지만, 에스라서는 그 사건의 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 낸다. 역사는 같지만, 주어가 다르다. 마르둑이 아니라 여호와, 제국의 정책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빛 아래 놓이는 순간, 비로소 귀환은 역사에서 신앙이 된다.

    이 대목은 이사야의 문장 속에서도 미리 울린다. 고레스는 “나의 목자”로 불리고(사 44:28),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드신다고까지 말해진다(사 45:1). 제국의 왕이 어느새 하나님의 도구로 읽힌다. 하나님의 섭리는 경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바깥의 권력과 제도의 틈까지 타고 들어와 자기 백성을 다시 불러낸다.

    이 오래된 장면이 오늘 더 서늘하게 읽히는 까닭도 있다. 한때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통해 귀환과 해방의 소식이 흘러나오던 그 기억의 저편에서, 오늘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공습이 같은 하늘 아래 전쟁의 참상을 덧씌우기 때문이다. 왕의 칙령 너머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 내던 기억의 후손들이, 이제는 그 손길을 밀어내고 권력과 힘의 언어에 더 깊이 붙들린 채 또 다른 폐허를 만들어 내는 듯 보이는 것. 역사는 때로 이렇게, 어제의 출구를 오늘의 불길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이 문지방은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누가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가. 누가 다시 흩어 놓는가.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길에서는 멀어지는가. 그 물음이 지금의 우리를 다시 붙든다.

    귀환은 먼저 사람의 깊은 속에서 불붙는다. 잠든 마음이 깨이고, 식어 있던 뜻이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은 왕의 손만이 아니다.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가슴이 함께 들썩인다. 칙령은 위에서 떨어지지만, 귀환은 안에서 타오른다—마른 들판 아래 숨은 불씨가 바람을 만나 한꺼번에 살아나듯.

    이 오래된 장면은 오늘의 미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종이 한 장이 사람의 운명을 가르고, 행정의 문장은 어느새 가족의 식탁까지 수색하는 시대다. 누군가는 국경을 넘었으나 끝내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고 세금을 내고 이웃의 집을 세워 주었으나, 법 앞에서는 여전히 지워도 되는 연필 자국처럼 취급된다. 정기 보고를 위해 출석한 자리가 곧 체포의 문턱이 되고, 오래 살아 낸 성실보다 추방 명령 한 줄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다. 서류미비자들에게 포괄적 이민개혁법안이란, 너무 오래 수평선 너머에서만 번쩍이다 끝내 육지에 닿지 못한 빛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한 문장이 법이 되어 오래 잠겨 있던 문을 열고,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저마다의 식탁과 주소와 이름으로 돌려보내는 날이 온다면 어떨까. 오래 임시로 붙들고 살던 삶이 비로소 제 뿌리를 찾고, 불안정하게 매달려 있던 일터와 거처와 호명이 다시 하나로 이어지는 날이 온다면 어떨까.

    에스라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날을 미리 가슴에 그려 보는 일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끝내 와야 할 날, 아직 손에 잡히지 않으나 이미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움직이기 시작한 날. 사람의 제도와 계산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조용히 문을 밀고 있다는 믿음. 귀환은 언제나 거기서 먼저 시작된다.


    무엇이 돌아오는가

    이 책이 갑자기 깊어지는 순간은 에스라 1:5와 1:11 사이이다—“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다 일어나니”(1:5), 그리고 “그 그릇의 수효가 모두 오천사백이었더라”(1:11). 먼저 사람들의 마음이 깨어난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오래 빼앗겼던 성전의 기물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하나님의 집에서 불빛을 받던 은잔과 금그릇들. 그러나 오랫동안 이방 신전의 그늘 아래 놓여, 제 이름도 제 자리도 잃은 채 낯선 제국의 창고 속에서 잠들어 있었을 것들. 이제 그것들이 다시 빛 앞으로 옮겨진다. 마치 오랜 포로 생활 끝에, 사물들조차 자기 기억을 되찾는 것처럼.

    그릇들은 하나하나 헤아려지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마침내 기록된다. 거룩한 것은 끝내 관념으로 남지 않는다. “오천사백”이라는 차갑고 정확한 숫자 속에까지 붙들린 채, 세스바살의 손에 들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날 폐허를 향해 길을 오른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예배의 기억이 올라가고, 공동체의 심장이 올라가고, 오래 끊겼던 거룩의 호흡이 다시 언덕을 올랐다.

    그러므로 귀환은 중심의 귀환이다. 질서의 귀환이다. 잃어버린 예배의 호흡이 다시 몸을 얻는 일이다.

    에스라서가 먼저 성전 기물을 보여 주는 까닭도 거기 있다. 포로는 사람만 끌고 가지 않는다. 예배의 중심을 먼저 빼앗고, 기억의 숨결을 흐리게 하고,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살아야 하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그러니 귀환도 사람만 돌아온다고 끝나지 않는다. 성전에서 쓰이던 그릇 하나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한 공동체의 영혼이 잃어버린 맥박을 다시 되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바로 여기서 책 전체의 방향이 환해진다. 본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책이었고, 그 안에는 세 번의 귀환이 길고 깊게 흐른다. 첫 귀환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로(스 1–6장), 둘째 귀환은 흩어진 삶의 한가운데 말씀을 다시 놓는 일로(스 7–10장), 셋째 귀환은 허물어진 성벽과 공동체의 일상을 다시 일으키는 일로(느 1–13장) 이어진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이 긴 귀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백성 되는 법을 배워 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광야처럼 읽힌다.

    겉으로는 장면이 각각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끝내 하나의 물음만 흐른다. 멸망 이후, 우리는 무엇을 다시 중심에 놓을 것인가. 무엇이 흩어진 우리를 다시 하나의 백성으로 묶어 낼 것인가.

    대답은 마침내 단순하다. 돌아와야 할 중심은 성전이고, 말씀이고, 그 둘 앞에 다시 서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귀환의 핵심은 장소가 아니라 중심에 있다. 집 문턱을 다시 밟았어도 중심을 잃으면 아직 포로이고, 무너진 것이 다 복구되지 않았어도 중심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귀환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이 작은 동사 안에도 높낮이가 있다. 귀환은 뒤를 향한 회귀이면서 동시에 위를 향한 상승이다. 발은 길을 옮기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마음의 기울기가 바뀐다. 흩어졌던 몸과 마음이 다시 하나님 쪽으로 돌아서고, 오래 낮아져 있던 영혼이 잊었던 중심을 향해 천천히 얼굴을 든다.

    어쩌면 우리도 마음속에 저마다 이방의 창고 하나씩을 품고 사는지 모른다. 그 어두운 창고 한구석에는 오래 맡겨 둔 성전의 그릇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처음 사랑, 식어 버린 기도,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 말씀, 한때 분명히 하나님께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낯선 이름 아래 놓여 있는 삶의 중심 같은 것들이다. 에스라서는 그 닫힌 창고 문을 조용히 열어 보이며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먼저 돌아와야 할 것은 사람의 주소인가, 아니면 삶의 중심인가.

     

    왜 폐허인가

    이 책이 끝내 붙드는 곳은 번영의 도시가 아니라 무너진 예루살렘이다. 성전은 타 버렸고, 성벽은 허물어졌고, 도시의 영광은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바람 한 줄만 스쳐도 돌틈에서는 먼지가 일고, 한때 찬양이 오르내리던 자리에는 적막이 눌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그곳인가. 왜 사람들은 더 넓고 더 따뜻한 땅이 아니라, 상처가 아직 식지 않은 폐허를 향해 다시 걸어가야 했을까.

    거기가 약속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더 나은 조건이 아니라 더 깊은 부르심이었다. 귀환은 안락함의 선택이 아니었다. 책임의 선택이었다. 폐허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나간 날을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뜻이 아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이다. 재 위에 무릎을 꿇고, 다시 백성이 되는 법을 처음부터 배우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은 폐허 위에 값싼 위로를 덮어 주지 않는다.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만, 공동체는 한순간에 하나가 되지 않는다. 환호 사이로 눈물이 번지고, 기쁨의 소리 밑바닥에는 오래된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율법은 낭독되지만 순종은 더디고, 돌아왔다고 해서 곧바로 안식이 시작되지는 않는다.

    귀환은 끝이 아니라 훈련의 시작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배운다. 하나님 없는 번영보다 하나님 앞의 불편이 더 참된 삶이라는 것을. 장소를 되찾는 일과 존재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집은 다시 들어간다고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이 글은 오늘의 삶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든다. 사람은 더 안전한 곳, 더 편안한 자리, 더 나은 조건으로 옮겨 가는 일을 구원이라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끝내 남는 물음은 따로 있다. 나는 정말 돌아왔는가. 주소는 옮겼으나 중심은 아직 제국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몸은 떠났으나 마음은 여전히 포로의 질서 안에 눌러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에스라서가 오래 읽히는 까닭은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몇 사람, 오랫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그릇 하나가 다시 빛을 받는 순간, 그리고 폐허를 향해 다시 발을 내딛는 공동체를 끝내 하나님이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귀환은 무엇보다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고, 그들이 그 부름에 다시 몸을 일으켜 응답하는 일이다.

    역대기의 족보가 흩어진 이름들을 한 줄로 꿰어 기억의 그물을 만들었다면, 에스라서에서는 그 이름들이 마침내 발을 얻는다. 연대가 기억의 형체였다면, 귀환은 그 기억이 걸음을 얻는 순간이다. 이름은 다시 불리고, 사람들은 일어나고, 약속은 마음속에서 불씨처럼 살아난다. 성전은 무너졌으나, 중심은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에스라서는 단지 돌아온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다. 멸망 이후에도 인간이 무엇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책이다. 폐허를 피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중심을 세우는 법을 배우게 하는 책이다.

    지금 내 삶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이방의 창고에 맡겨 둔 성전의 그릇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를 떠나왔고, 이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어쩌면 귀환은 먼 길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일이 아니라,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잃어버린 중심 하나가 다시 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에스라서는 오랫동안 회복의 역사서, 혹은 역대기의 뒤를 잇는 기록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현대 연구는 더 섬세한 그림을 보여 준다. 휴 윌리엄슨은 포로 후기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학을 읽는 중요한 토대를 놓았고, 타마라 에스케나지는 이 책을 멸망 이후 공동체가 스스로를 다시 조직해 가는 회복의 청사진으로 읽는다. 데이비드 얀젠은 제국의 질서와 공동체의 정체성이 이 책 안에서 어떻게 긴장하는지 날카롭게 보여 준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단지 옛 귀환의 기록이 아니다. 멸망 이후 무엇으로 다시 백성이 될 것인가를 묻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문지방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