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순례 (뉴스앤조이) 202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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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숫자로 불려 길 위에 선 공동체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민수기 1: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숫자로 시작되는 이야기

민수기는 뜻밖에도 숫자로 문을 연다. 서사가 아니라 계수다. 그러나 그것은 익명의 나열이 아니다. 광야로 나아가기 직전,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한 줄씩 제자리를 확인 받는 장면이다. 아직 길은 시작되지 않았고, 위험도 본격화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먼저 멈추게 하신다. 달리기 전에 서게 하시고, 나아가기 전에 방향을 가다듬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을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민 1:1–2). 이 명령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흩어짐을 막기 위한 자리의 배치다. 공동체는 먼저 자기 위치를 확인 받고, 그 다음에 길 위에 오른다. 이 짧은 서문 안에 민수기 전체의 리듬이 이미 들어 있다.
광야의 시간은 감정이나 기세로 열리지 않는다. 질서와 인내가 먼저다. 번호를 부여 받는 장면은 통제라기보다 보호에 가깝다. 흩어짐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이며, 길 위에서 공동체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한 첫 준비다.
민수기는 종종 ‘광야의 실패기’로 기억된다. 불평과 반역, 사십 년의 지체. 그러나 민수기의 첫 장면은 실패가 아니라 확인이다. 하나님은 광야로 길을 떠나기 전에, 먼저 백성을 세워 놓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살피신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무리가 아니라 얼굴을 지닌 존재로.
숫자는 대개 익명화의 언어로 작동한다. 합계와 비율은 상황을 설명하지만, 얼굴과 이야기는 쉽게 가린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계수는 그 흐름을 거슬러 작동한다. 세는 행위는 삭제가 아니라 보존이며, 계산이 아니라 책임의 선언이다. 여기서 질서는 통제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 가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된다.
민수기 1장은 이 공동체를 ‘회중’이라 부른다. 계수의 대상은 무작위로 집계된 인구가 아니라, 종족과 가문으로 이어진 관계의 사람들이다. 숫자는 개인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드러낸다.
특히 계수의 중심에 놓인 이들은 스무 살 이상,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이다. 이는 팽창이나 정복을 위한 동원이 아니다. 광야라는 불안정한 공간에서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고, 대열을 유지하며, 순례를 중단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이 지점에서 민수기의 계수는 오늘의 풍경과 선명하게 겹쳐진다. 우리는 여전히 숫자가 사람을 가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미국의 강압적인 이민 단속 통계가 매일같이 보도되지만, 그 숫자 안에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얼굴들이 숨겨져 있다. 새벽에 체포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학교에서 돌아와 텅 빈 집 앞에 멈춰 서는 아이, 전화기 너머에서 숨을 고르며 울음을 삼키는 가족의 목소리. 숫자는 상황을 요약할 수는 있어도, 상실의 결을 끝까지 품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숫자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을 붙들기 위해 몸을 내미는 이들이 있다. 호루라기로 단속을 알리는 사람들,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 총구 앞에 맨몸으로 서서 시간을 벌어 주는 사람들. 이들은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서로의 등을 확인하며 흩어지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열을 이룬다.
민수기에서 스무 살 이상,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이들이 계수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공격을 위한 동원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라지지 않기 위한 대비였다. 광야에서의 ‘싸움’은 적을 쓰러뜨리는 일이 아니라, 무너짐을 막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오늘의 연대 역시 숫자에서 밀려난 한 사람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몸의 기억이며,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래서 민수기 1장 마지막에 제시되는 숫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라는 전사 수는 규모의 과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처음으로 자기 그림자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광야 한가운데서 이들은 마침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숫자가 사람을 지우는 방향이 아니라, 한 사람도 놓치지 않기 위한 확인으로 작동할 때, 계수는 비로소 공동체를 지키는 언어가 된다.
탈출 이후의 시간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둘 다 길 위에서 쓰인 책이며, 그 여정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두 책은 다투기 좋아하고 배은망덕한 백성의 얼굴을 숨기지 않는다. 음식과 물을 둘러싼 반복된 불평과 원망, 쉽게 흔들리는 믿음이 이어진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민수기에는 정탐꾼 사건이 놓인다. 두 번 모두 하나님은 공동체의 종말을 말씀하시고, 두 번 모두 모세는 용서를 구한다. 이 닮음 속에서 민수기는 익숙한 기시감을 남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은 갈라진다. 출애굽기가 ‘어디에서 벗어났는가’를 묻는 from의 이야기라면, 민수기는 ‘이제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를 묻는 to의 이야기다. 하나는 탈출의 기억을 기록하고, 다른 하나는 도착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묻는다. 민수기는 더 어둡고, 더 무겁다. 떠나는 결단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넜을 때는 방향이 분명했다. 뒤에는 이집트가 있었고, 앞에는 아직 이름 없는 자유가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고, 되돌아갈 길도 막혀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 들어서면 상황은 달라진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더 이상 또렷하지 않다. 민수기는 바로 이 모호한 중간지대에서 시작된다. 탈출 이후, 목적지 이전의 시간이다. 자유를 얻은 뒤, 그 자유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구간이다.
이 책이 유난히 무겁게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래를 향해 걷고 있지만, 그 미래가 아직 선명한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약속은 주어졌으나, 그 약속을 신뢰하며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불평과 반역이 반복되는 것도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서가 아니라, 기다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다.
‘순례’라는 두 글자는 단순한 이동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멀리 왔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어떤 사람으로 다시 빚어지는가의 문제다. 민수기의 광야는 지나쳐 가는 배경이 아니라, 정체성이 재정렬되는 자리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집트의 노예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배열되는 공동체로 서기 시작한다. 자유는 이미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감당할 존재로 성형되는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된다.
민수기 1장의 계수는 군사적 준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선 차원에서는 존재의 재배치다. 싸우기 위해 모인 숫자가 아니라, 길을 걷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는 행위다. 광야는 방향 없는 방황이 아니라, 계수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행진이 된다. 각 사람은 숫자로 불리지만, 그 숫자는 익명화가 아니라 책임과 위치를 뜻한다. 순례는 무작정 떠나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정렬된 자리에서 시작되는 오래고 느린 걸음이다.
이 서문은 민수기 전체를 관통하는 복선처럼 작동한다. 광야에서 쓰러질 사람들, 끝내 들어가지 못할 세대, 그리고 다시 세어질 다음 세대까지. 민수기가 묻는 질문은 ‘누가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자기 자리를 붙들었는가’다. 그래서 민수기의 비극은 길을 잃은 데 있지 않다. 방향을 상실하기 전에,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를 내려놓았다는 데 있다.
다시 세어지는 사람들
우리는 종종 숫자로 불린다. 통계와 성과, 팔로워와 실적이 사람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숫자는 질서를 만들지만, 동시에 얼굴을 흐리게 한다. 이름은 지표 뒤로 밀려나고, 사람은 교체 가능한 단위처럼 취급된다. 숫자가 앞서고 이야기가 사라질 때, 인간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소모의 대상으로 남는다.
그러나 민수기의 숫자는 이 익명화의 언어를 거슬러 흐른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 사람을 지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을 끝까지 붙드신다. 광야에서의 계수는 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이다. 공동체를 통제하기 위해 세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길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신다.
민수기의 계수는 한 세대에 머물지 않는다. 시내 광야에서 이루어진 첫 계수 이후, 약속의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다시 계수가 이루어진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쓰러지고 한 세대는 광야에 남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세신다. 이는 실패를 덮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약속을 다음 세대에 이양하기 위한 준비다. 순례는 중단되지 않고, 책임은 다음 사람의 손으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민수기의 서문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길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숫자 속에 흘려보내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당신은 어떤 흔적으로 남을 것인가. 성과로만 기억될 존재인가, 아니면 맡겨진 자리와 책임으로 기억될 사람인가. 이 질문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향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어떤 질서와 어떤 이름으로 남기고 있는가.
이 책이 지금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야의 실패담을 반복해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불리고, 다시 맡겨지며, 다시 걸어야 할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민수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세대를 기록하지만, 동시에 순례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지는 공동체를 남긴다. 숫자는 달라져도 방향은 지워지지 않는다. 세대는 바뀌어도 길은 이어진다.
어쩌면 우리의 삶 역시 아직 서문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숫자로 불리며 흘려보낸 시간을 지나, 이제는 자리를 맡고 책임을 지며 걸어가야 할 문지방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민수기의 첫 문장은 그 문지방에서 낮고 단단하게 말한다. 이제 세어졌으니 흩어지지 말고 걸어가라고. 혼자가 아니라, 다시 세어진 사람들로 함께 걸어가라고.
※ ‘민수기’로 불리는 이 책의 본래 이름은 히브리어 베미드바르(‘광야에서’)이다. 구약성경은 종종 책의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삼았고, 이 책 역시 “시내 광야 회막에서”(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후대에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은 인구조사에 주목해 이 책을 아리스모이(‘숫자들’), 곧 Numbers라 불렀다. 제목의 변화는 읽기의 방향을 드러낸다. ‘광야에서’가 장소의 체험을 가리킨다면, ‘민수기’는 그 장소를 견디게 하는 질서의 언어다.
이러한 이해는 최근 민수기 연구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바룩 슈워츠는 민수기를 산발적으로 모인 자료의 집합이라기보다, 광야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배열된 이야기로 읽어 왔다. 제이콥 밀그롬 역시 계수와 진영 질서를 단순한 행정 절차로 보지 않고, 비정착의 공간에서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신학적 장치로 해석해 왔다. 이 관점에서 민수기 1장의 계수는 군사 동원이라기보다, 광야 한복판에서 공동체가 스스로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선언에 가깝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사람을 숫자로 환원하지 않으신다. 각 남자의 수를 ‘그 명수대로’ 계수하라는 명령은 익명화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숫자 속에서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겠다는 책임의 표현이다. 603,550명이라는 전사 수 뒤에는 각자의 이름과 이야기, 그리고 공동체에 맡겨진 몫이 있다. 계수는 계산이 아니라 기억이며, 통제가 아니라 약속이다. 그래서 민수기는 행정 문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질서 속에 다시 세워진 공동체의 순례를 증언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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