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소명, 하나님의 아픔을 맡은 입술 (뉴스앤조이) 202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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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하나님의 아픔을 맡은 입술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예레미야 1:1, 4-10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성벽보다 먼저 병든 마음
무너진 것은 성벽이 아니라, 먼저 심장이었다. 성벽에 금이 가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먹고, 만나고, 걷고, 웃으며 평소처럼 살아갔다. 그러나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깊은 곳에서는 이미 병이 번지고 있었다.
예루살렘도 겉으로는 멀쩡했다. 성전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제사장들은 돌계단을 오르내렸으며, 시장에서는 은전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벽보다 먼저 무너지고 있는 마음을 보고 계셨다.
사람들은 북쪽에서 밀려오는 적군의 발소리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멀어져 가는 마음을 더 아파하셨다. 성전의 문은 열려 있었고 제사는 계속되었지만, 입술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과 실제 삶 사이의 거리는 날마다 벌어졌다. 예배는 남아 있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미 온기를 잃고 있었다.
하나님께 그것은 단순한 율법 위반이 아니라, 사랑하던 백성이 마음으로 떠나 버린 관계의 파국이었다. 오래 사랑한 이가 같은 집에 머물면서도 더는 눈을 맞추지 않고, 이름은 부르면서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배신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의 심판은 냉정한 판결문이라기보다,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입은 깊은 상처에 가깝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아픔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나라의 균열을 보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정세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백성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통증을 자기 가슴으로 받아냈다.
남들이 성벽의 균열만 바라볼 때, 예레미야는 그보다 깊은 곳에서 백성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상처를 보았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전쟁보다 상처를 먼저 말하고, 나라의 붕괴보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무너진 관계를 먼저 드러낸다.
그의 출발점도 심상치 않다. 예레미야가 태어난 아나돗은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쫓아 보낸 곳이었다.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의 중심이 아니라, 밀려난 제사장의 기억이 남은 변두리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시대의 상처와 함께 중심 밖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배어 있다.
이사야서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로 시작한다면,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말”로 시작한다. 이사야의 서문에서는 눈이 먼저 열리고, 예레미야의 서문에서는 입이 먼저 붙들린다. 이사야가 무너져 가는 시대를 바라본 사람이라면, 예레미야는 그 무너짐의 한복판에서 끝까지 말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는 남유다의 마지막 숨소리를 곁에서 들으며,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침묵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요시야의 개혁에서 시드기야 시대의 함락까지 이어지는 차가운 연대기에는 한 나라의 몰락과 백성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상처가 함께 배어 있다.
예레미야서는 첫머리부터 마지막을 숨기지 않는다. 아직 무너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끝을 먼저 아는 입술로 말을 건다. 아나돗의 소외에서 예루살렘의 몰락, 왕들의 무능과 제국의 압박, 폐허 이후 다시 심으시는 약속까지, 이 서문에는 예레미야서 전체의 여정이 미리 담겨 있다.
예레미야서는 한 나라의 몰락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배신당한 사랑이 심판을 지나 새 언약으로 관계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렘 31:31–34).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은 그래서 낭만적이지 않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 이 말씀은 따뜻한 위로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무게다. 그는 탁월한 재능으로 예언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놓인 사람이었다.
그의 길은 학습해서 찾아낸 길이 아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붙들린 길이었다. 더구나 그의 소명은 평온한 시대에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앗시리아가 기울고 바벨론이 떠오르며, 유다의 지도자들이 이집트에 기대려 하던 격변기 한복판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부름받은 예레미야의 첫 반응은 망설임이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그 떨림은 그의 예언 생애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흔들림 없는 영웅이 아니라, 울고 지치고 하나님께 항변하며 자기 생일을 저주할 만큼 고통받은 사람이었다(렘 20:14–18).
예레미야의 입술은 강해서 쓰임 받은 것이 아니다. 떨렸기에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놓일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만 전한 예언자가 아니라, 그분의 아픔을 자기 가슴으로 받아 낸 사람이었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자리에서 함께 아파하며, 끝내 입을 열어야 하는 부르심이었다.
떨리는 입술에 닿은 말씀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약함을 말로 몰아세우지 않으신다. 조용히 손을 내미신다. 말문이 막힌 젊은 예언자의 입술로 그 손이 천천히 다가간다. 예레미야의 숨은 짧아지고, 바짝 마른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 하나님의 손끝이 그의 입술에 가만히 닿는다. 천둥도 없고 군대의 함성도 없다. 그러나 그 짧은 접촉으로 두려움에 닫혀 있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입술이 된다.
그 순간 하나님은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다. 백성을 향한 자신의 아픔까지 그 떨리는 입술에 맡기셨다.
그 조용한 접촉 위에 예레미야서의 문지방이 놓인다. 말할 수 없다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그 순간 하나님은 말할 권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자신의 뜻과 아픔을 한 사람의 떨리는 입술에 맡기신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말과 삶을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부르심이었다.
이제 그의 입술은 시대의 거짓을 찢고, 감추어진 상처를 드러내며, 아직 오지 않은 회복을 먼저 품는 자리가 된다. 입술은 작다. 손보다 작고, 칼보다 약하며, 군대보다 느리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입술은 때로 성벽보다 오래 남는다.
성경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연약한 입술을 세운다. 모세의 더듬는 입,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 예레미야의 어린 입, 마리아의 짧은 응답이 그렇다. 하나님은 제국의 무기가 아니라 떨리는 인간의 입술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신다.
예레미야의 입에 놓인 말씀은 부드럽기만 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섯 동사를 맡기신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신다(렘 1:10). 앞의 넷은 무너뜨리고, 뒤의 둘은 다시 세운다. 이 여섯 동사 안에 예레미야서 전체의 심판과 회복이 함께 들어 있다.
회복보다 심판이 길고, 위로보다 해체가 먼저 온다. 그러나 파괴가 마지막은 아니다. 뽑는 것은 다시 심기 위해서이며, 넘어뜨리는 것은 거짓을 걷어 내기 위해서다. 예레미야의 심판은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백성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백성 앞에 상처 입은 남편처럼(렘 3:20), 떠나간 자식을 부르는 아버지처럼 서 계신다(렘 31:20).
이 여섯 동사는 예레미야서 전체를 여는 열쇠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와 거짓 안전을 드러내고, 성전이 민족을 저절로 지켜 줄 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린다.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가 함께 만든 거짓 평안 속에서도 그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너뜨리는 말에서 멈추지 않는다. 포로들에게 집을 짓고 밭을 가꾸며,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한다(렘 29:5, 7).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밭을 사고 새 언약을 선포하며, 마음에 새겨질 말씀을 기다린다. 처음의 여섯 동사 안에는 이미 심판을 넘어 다시 세우고 심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
이어지는 두 환상은 예레미야의 소명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먼저 핀 살구꽃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지켜 이루실 것을 보여 주고, 북쪽에서 기울어진 끓는 가마는 심판이 이미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렘 1:11–14). 예레미야는 다가올 재앙만 본 사람이 아니라, 심판과 약속을 함께 붙든 사람이었다.
.예레미야가 가장 힘겨웠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건설과 심기의 말, 성전과 제도가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는 평안만 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을 전해야 했다.
성전이 있어도 하나님을 잃을 수 있고, 예배가 남아 있어도 정의가 사라지면 공동체는 무너진다(렘 7:4–7). 예레미야가 문제 삼은 것은 건물이 아니라, 제도만 남고 관계와 마음이 비어 가는 신앙이었다. 그의 차가운 경고가 거짓 위로보다 더 자비로운 이유다.
예레미야는 심판만 알린 예언자가 아니었다. 그는 배신당한 하나님의 아픔을 자기 입술에 맡겨 받은 사람이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입술의 부정을 고백하고, 에스겔이 포로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예레미야는 무너지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하나님 마음의 통증을 말해야 했다.
우리는 무너짐을 늦게 인정하는 시대를 산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을 쏟아 내지만, 한 사람의 고통 앞에 오래 머무는 언어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평안을 약속하는 말은 넘치지만, 상처를 정직하게 어루만지는 입술은 드물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입술은 지금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는 묻는다. 네가 듣고 싶은 말과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은 같은가? 네가 붙들고 있는 평안은 참된 평안인가, 아니면 무너지기 직전의 침묵인가? 네가 지키려는 것은 성전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인가?
예레미야는 눈물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예언자다. 예루살렘의 붕괴를 말하면서 포로들의 귀환을 약속하고(렘 29:10), 폐허 한복판에서 새 언약과 마음에 새겨질 말씀을 선포한다(렘 31:31–34).
그의 희망은 무너짐을 외면한 낙관이 아니다. 폐허를 끝까지 바라본 뒤에도, 하나님이 다시 세우고 심으실 것을 믿는 오래 견디는 희망이다.
폐허에 심은 말씀
예레미야의 입술은 말로만 예언하지 않았다. 그는 왕과 제사장과 백성과 열방 앞에 서고, 때로는 항아리를 깨뜨렸다. 산산이 흩어진 조각은 곧 깨어질 예루살렘의 운명을 눈앞에 펼쳐 보였다(렘 19:10–11).
때로는 나무 멍에를 어깨에 메고 거리를 걸었다(렘 27:2). 살을 짓누르는 그 무게는 곧 닥칠 포로의 삶을 미리 몸에 얹은 것이었다. 그가 받아 적은 두루마리가 왕의 칼에 찢겨 화로 속으로 사라질 때에도, 불에 탄 것은 두루마리였을 뿐 말씀은 아니었다(렘 36:23, 27–28).
예레미야서는 묻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태울 수 있는가? 권력이 기록을 찢고 불태워도 말씀까지 없앨 수 있는가? 불에 탄 것은 두루마리였을 뿐,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기록되고 끝내 살아남았다.
그의 입술은 마침내 폐허 이후를 말하는 법을 배운다. 불타는 성전과 무너진 성벽, 포로들의 긴 행렬 뒤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간 오월 이후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다.
성전이 무너진 뒤에도 신앙은 새로운 자리에서 숨을 쉰다. 왕권이 꺾이자 언약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은 바로 그 폐허에서 태어난다(렘 31:31–34).
돌판에 새겨졌던 말씀이 심장에 새겨지고, 성전에 머물던 신앙이 사람의 삶으로 깊어진다. 제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 책은 부름받은 사람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거짓 평안과 권력에 기대는 말, 하나님의 이름으로 현실을 가리는 말,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말이 어떻게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지 드러낸다. 동시에 한 사람의 떨리는 입술에 맡겨진 말씀이 어떻게 폐허 너머에 새로운 길을 여는지도 보여 준다.
오늘 우리에게도 입술이 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시대의 거짓에 가담할 수도 있는 입술이다. 침묵해야 할 때 쏟아 내는 말도 위험하지만, 말해야 할 때 삼키는 침묵도 위험하다. 예레미야의 문지방에 서면 우리는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묻게 된다. 지금 내 입술에는 누구의 말이 놓여 있는가?
내 말은 무엇을 뽑고 있는가. 무엇을 심고 있는가. 무너지는 것을 무너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가.
예레미야서의 첫 문은 말이 넘치는 시대의 우리를 조용히 멈춰 세운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아픔과 희망을 맡길 한 사람의 입술을 찾으신다.
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 시대에 놓였는가.
※ 현대 예레미야서 연구는 이 책을 단순한 심판의 기록이 아니라, 전쟁과 추방으로 무너진 공동체가 상실을 견디며 다시 살아갈 언어를 찾는 책으로 읽는다. 월터 브루그만은 제국의 논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하는 자리로, 루이스 스툴먼과 캐슬린 오코너는 트라우마와 회복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예레미야서는 멸망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폐허 한가운데서 다시 심을 말을 찾게 하는 성경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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