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연대, 이름들이 나라가 될 때 (뉴스앤조이) 20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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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이름들이 나라가 될 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역대상 1:1, 2:1-2, 9:1-2
아담, 셋, 에노스 …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더라 …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먼저 그들의 소유지와 성읍들에 거주한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불에 그을린 성벽 아래, 누군가 폐허 속에서 돌이 아니라 이름을 줍는다. 흙 묻은 조각 하나를 뒤집자 글자가 드러난다. 아담. 조금 더 파내자 셋, 에노스가 따라 나온다. 이름 하나가 또 하나를 불러내고, 비어 있던 터가 서서히 사람들로 차오른다. 처음 열리는 장면은 이렇다. 사건보다 먼저 이름이 걸어 나온다.
처음 읽는 눈에는 숨 막히는 명단일 수 있다. 그러나 귀환한 이들에게 이 이름들은 장벽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표식이었다.
무너진 집터에 쪼그리고 앉아 흙 속에 묻힌 주춧돌을 다시 더듬는 손길, 돌무더기 사이에 끼어 있던 오래된 문패를 하나씩 꺼내 닦는 일과 비슷했을 것이다.
집을 잃은 것인지, 사람을 잃은 것인지, 역사를 잃은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때에, 그들은 공동체를 다시 세울 첫 단서를 이름에서 찾았을 것이다.
어쩌면 먼저 무너진 것은 나라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문장이 먼저 허물어졌다. 성전은 불탔고, 성벽은 찢겼고, 왕조는 끊겼다. 그러나 더 깊은 파괴는 기억의 파괴였다. 함께 불리던 이름들이 흩어지고, 한 백성이라는 감각이 풀리고, 어제의 이야기가 오늘의 삶과 이어지지 않을 때, 공동체는 눈앞의 폐허보다 먼저 마음의 집을 잃는다.
제도를 세우기 전에, 대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다시 모아야 했다. 족보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흩어진 공동체를 다시 짜 올리는 첫 베틀질이다.
그리고 그 첫 매듭 안에는 뒤이어 펼쳐질 세계의 결이 이미 들어 있다. 아담에서 시작한 이름의 물줄기는 마침내 다윗의 집으로 모이고, 흩어진 백성을 다시 잇는 기억의 손길은 성전과 예배의 질서로 이어진다.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 긴 흐름의 가장 깊은 숨이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앞머리에 붙은 장식이 아니다. 몇 줄의 이름 속에 이미 숲 전체의 윤곽이 서 있다.
폐허 위의 아담
아브라함도 아니다. 다윗도 아니다. 예루살렘도 아니다. 처음 불려 나오는 이름은 뜻밖에도 아담이다. 폐허를 끌어안고 돌아온 사람들 앞에 가장 먼저 펼쳐 보이는 것은 첫 사람의 이름이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시야가 단숨에 열린다. 포로의 상처를 변두리의 비극으로 가두지 않고, 인류의 첫 새벽까지 끌어올린다.
대담하다. 폐허를 수습할 때 사람은 대개 눈앞의 손실부터 헤아린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장 먼 이름부터 다시 부른다.
아담.
그 한 이름을 꺼내 듦으로써 지금의 상처를 더 큰 이야기 안에 다시 놓는다. 너희는 제국의 발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잔재가 아니다. 너희의 뿌리는 패배보다 깊고, 바벨론보다 오래되었다. 너희의 계보는 처음 사람을 빚으시고 이름을 부르시던 새벽까지 닿아 있다.
귀환 이후의 현실은 초라했을 것이다. 돌아와 보니 땅은 더 이상 익숙한 땅이 아니고, 공동체는 예전의 얼굴을 잃었으며, 기억마저 금이 가 있었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먼지가 날리고, 비어 있던 집에는 낯선 침묵이 내려앉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면서도 아직 같은 이름 아래 서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그때 잿더미 위로 새벽이 열린다. 그 한 이름이 막힌 숨을 틔운다. 패배보다 먼저 있었던 시작, 멸망보다 오래된 부르심이 그 이름 안에서 다시 밝아온다. 무너진 공동체의 시선이 폐허의 바닥에서 창조의 첫 빛을 향해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그래서 족보는 단순한 과거 정리가 아니다. 기억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캐묻기보다, 어디까지 이어져 왔는가를 보여 준다. 뿌리를 다시 본다는 것은 옛날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버티게 하는 일이다. 사람은 미래보다 먼저 자기 기원을 잃어버릴 때 무너진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부르심 안에 있는지, 어떤 큰 이야기 속에 놓여 있는지를 잊어버리는 순간, 삶은 흩어진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간다.
그래서 가장 먼 첫 이름부터 다시 부른다. 창조의 새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공동체를 과거에 붙들어 두는 일이 아니라, 다시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일이다. 무너진 사람들을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일이다.
이름들이 다시 서로의 곁을 찾는다
족보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죽은 명단처럼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 그 짧은 머리말 아래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 잇사갈과 스불론, 단과 요셉과 베냐민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 차례로 놓이는 순간, 흩어졌던 형제들이 다시 한 호흡 안으로 돌아온다. 이름들은 줄지어 서기보다 한 문장 안에서 서로의 곁을 다시 찾아간다. 마치 오래 끊겨 있던 강물이 제 물길을 되찾듯, 따로 흩어졌던 이름들이 한 문장 속에서 다시 한 백성의 몸을 이룬다.
공동체는 종종 제도보다 문장으로 먼저 돌아온다. 어떤 이름을 누구의 곁에 다시 세우는가,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신학이 된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일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다. 흩어진 이름들을 다시 한 문장 안에 놓고, 끊어진 호흡을 같은 숨결로 잇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공동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온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낡은 음절들의 행렬일 뿐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다시 같은 식탁에 앉고 같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기억의 귀환이다.
무엇보다 이 족보는 매끈하지 않다. 어떤 줄기는 길게 뻗고, 어떤 줄기는 짧게 끊긴다. 어떤 이름은 또렷이 빛나다가, 어떤 이름은 바람에 스친 불씨처럼 스쳐 간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사라진 듯 남아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실제적이다. 완전한 혈통의 순도를 자랑하는 차가운 벽이 아니라, 상처와 단절을 지나서도 끝내 기억을 놓지 않으려 버텨 온 공동체의 거친 천 조각에 가깝다. 해어진 곳을 덧대고, 끊어진 실을 묶고, 빠진 매듭을 다시 세우며 가까스로 이어 온 천이다. 손에 쥐면 금방이라도 올이 풀릴 듯 위태로운데, 이상하게 오래 견딘다.
하나님이 써 내려가시는 역사는 늘 반듯한 직선보다 상처 난 선에 더 가깝다. 한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건너갈 때마다, 한 세대를 지나 또 한 세대를 가까스로 건너온 공동체의 숨이 들린다. 그것은 승리의 행진곡이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 온 숨결의 박자다. 족보는 그래서 화려한 개선문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 몸을 낮춘 사람들의 낮은 노래가 된다.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람을 다시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누가 우리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서류와 번호와 통계가 사람을 지우는 시대에, 여기서는 반대로 사람을 이름으로 돌려놓는다. 잃어버린 존재를 불러 세우고, 흩어진 시간을 한 식탁에 앉힌다. 포로 귀환 이후의 회복은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서로를 기억하고, 다시 형제라 부르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회복은 벽을 올리는 일보다 이름을 잊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는다. 한 이름, 또 한 이름. 오래된 베틀 앞에 앉아 풀어진 실을 다시 거두어 엮듯, 공동체의 천을 처음부터 다시 짠다. 벽돌은 재빨리 올릴 수 있어도 신뢰는 그렇게 올라오지 않는다. 성벽은 며칠 만에 세울 수 있어도 “우리는 다시 한 백성이다”라는 감각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니 이 첫 아홉 장은 우회가 아니라 정면이다. 겉으로는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아픈 자리를 똑바로 지난다. 나라를 세우기 전에 먼저 함께 설 수 있는 이름들을 다시 세운다. 무너진 시대에 가장 급한 일은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끝내 잊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흩어진 백성이 ‘온 이스라엘’이 될 때
‘온 이스라엘’은 역대기에서 무려 쉰두 번 되풀이되는 이름이다. 9장에 이르면 긴 족보가 갑자기 몸을 얻는다.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이어 “먼저 그들의 소유지와 성읍들에 거주한 자들은 …”라는 문장이 따라온다. 그 한 구절에 닿는 순간, 추상처럼 흩어져 있던 이름들이 풍경이 된다. 바람 스치는 언덕으로 사람들이 돌아오고, 오래 비어 있던 집의 문이 다시 열리며, 먼지 쌓인 골목마다 발자국이 찍힌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 움직인다. 족보가 마침내 땅을 만난다. 이름들이 다시 살아 숨 쉰다.
그러나 이 장면은 아름다운 복원도만은 아니다. 실제의 공동체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을 것이다. 남과 북의 기억은 오래 불화했고, 돌아온 이들과 남아 있던 이들의 마음은 같을 수 없었다. 폐허는 한 번에 사라지지 않고, 상처는 돌아왔다고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 같은 집터를 바라보면서도 누구는 고향을 보았고, 누구는 끝내 낯선 땅을 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붙드는 이름은 현실의 복사본이 아니다.
온 이스라엘.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절실하고, 그래서 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이다. 이것은 눈앞의 현실을 베껴 적은 말이 아니라, 믿음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상상력이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공동체를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다시 불러야 할 이름을 먼저 부르는 결단이다.
'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 귀환한 이들과 남아 있던 이들, 남유다의 기억과 북이스라엘의 그림자,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까지,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이들을 먼저 한 이름 아래 묶어 낸다. 그것은 지금 있는 모습을 받아 적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공동체를 미리 불러 당기는 이름이다.
어쩌면 이 오래된 이름은 아직도 휴전선 위에 멈춰 선 한반도를 떠올리게도 한다. 총성은 멎었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평화는 늘 올 듯 말 듯 국경 밖을 맴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오래도록 서로를 낯선 이름으로 불러 온 땅.
그 앞에서 평화와 통일은 단번에 완성될 제도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먼저 서로를 한 역사 안에서 다시 기억하려는 결단, 먼저 불러야 할 이름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문제일지 모른다. 아직 눈앞에 다 보이지 않아도, 먼저 불러야 할 이름이 있고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될 미래가 있다.
여기서 두 글자가 또렷해진다. 연대. 그러나 그것은 오늘 우리가 습관처럼 말하는 느슨한 결속과 다르다. 흩어진 이름들을 다시 한자리에 세우는 기억의 연대이며, 세대의 연대이며, 더 깊게는 예배의 연대다. 끝내 모여야 할 중심은 정치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함께 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윗과 성전, 찬양과 질서가 뒤이어 펼쳐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회복은 결국 예배로 모인다. 이름은 성전으로 향하고, 흩어졌던 기억은 찬양 속에서 다시 자리를 얻는다.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을 때, 그제야 흩어진 이들은 비로소 한 백성이 된다. 그러므로 앞에 놓인 이 몇 줄은 지나간 과거를 정리하는 기록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비추는 빛이다.
이 오래된 족보는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도 낯설지 않다.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쉽게 이름을 잃어버리며 산다. 사람은 데이터가 되고, 공동체는 취향의 묶음으로 흩어지며, 기억은 빠르게 소비되다 사라진다. 연결은 넘치는데 소속은 얕고, 서로를 부르는 말은 많아졌는데 끝까지 기억해 주는 이름은 드물다.
그래서 이 낡고도 단단한 족보는 우리를 오래 붙든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이 나를 한 사람으로, 또 한 공동체의 일부로 세우는가. 족보를 읽는다는 것은 낡은 명단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다. 이름을 잃기 쉬운 시대에 흐려진 소속과 기억을 다시 짚어보고, 끝내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쉽게 해답을 건네지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이 다시 한 나라의 숨이 되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 대목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자기 삶의 문지방 앞에서 멈추게 된다.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누구와 함께 한 문장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어떤 이름들을 다시 불러, 아직 쓰이지 않은 공동체의 첫 문장을 시작하고 계신가.
※ 최근 연구는 이것을 사무엘-열왕기의 단순한 반복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포로 후기 공동체가 기억을 어떻게 다시 배열하고, 정체성을 어떻게 새롭게 세우며, 예배를 중심으로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를 보여 주는 독자적인 신학 해석으로 읽는다. 게리 크노퍼스 같은 학자들은 특히 ‘온 이스라엘’이라는 상상력과 족보의 공동체적 기능을 설득력 있게 부각해 왔고, 뒤이은 연구 역시 사회적 기억, 정체성, 그리고 1–9장의 족보가 품은 공동체의 미래 상상력에 더 주목해 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족보는 더 이상 지루한 서론이 아니다. 상처 입은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는 첫 문장이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다윗과 성전, 예배와 찬양, 기억과 희망으로 이어지는 전체의 숨은 악보가 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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