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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추락, 추락하는 왕들, 무너지지 않는 말씀 (뉴스앤조이) 20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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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회   작성일Date 26-04-03 17:08

    본문

    추락, 추락하는 왕들, 무너지지 않는 말씀

    •  미주뉴스앤조이 
    •  승인 2026.04.02 09:32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열왕기하 1:1-4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음으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매 엘리야가 가니라

    모든 붕괴에는 소리가 있다. 처음에는 아주 미세하다.

    나무 난간 하나가 삐걱거리는 소리. 발밑에서 금이 한 줄 번져 가는 소리. 아직 누구도 무너졌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미 집 안 어딘가에서 기울어짐이 시작되는 소리. 이 시작은 바로 그 소리를 들려준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왕하 1:1).

    한 왕의 죽음 뒤에 곧장 배반이 들어선다. 나라 밖에서는 속국이 등을 돌리고, 궁궐 안에서는 또 한 명의 왕이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다.

    햇빛은 기울고, 바람이 스쳐 가는 다락 끝에는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걸려 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을 난간은 어느새 추락을 예고하는 가장자리로 바뀌어 있다. 한때는 더 멀리 보기 위해 올라간 자리였을 것이다. 더 높이 서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작은 높은 곳의 뜻을 단숨에 뒤집는다. 높음은 안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흔들리는 자리였다. 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어두운 하강은 이미 시작된다.

    이것은 한 왕의 불행을 적어 둔 기록이 아니다. 한 시대의 균열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는 순간에 가깝다. 모압의 배반과 아하시야의 추락이 맞닿는 이 좁은 입구에는 벌써 한 권의 숲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네 절뿐인데도, 뒤에 올 왕들과 도시들과 폐허의 바람이 이미 그 사이를 지나간다.

    배반은 국경에서 먼저 일어나고, 추락은 궁궐 안에서 일어난다. 바깥에서는 질서가 풀리고, 안에서는 왕의 몸이 꺾인다. 나라가 먼저 흔들리고, 왕은 그 흔들림을 자기 몸으로 받아낸다. 이 서사는 그 미세한 떨림이 어디까지 번져 가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추락’은 다락 난간에서 미끄러진 한 몸의 낙상만 가리키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중심에서 바닥으로, 왕궁에서 폐허로 내려가는 이 책의 방향이 그 말 속에 들어 있다. 왕권의 쇠락, 북이스라엘의 멸망, 유다의 붕괴, 그리고 한 시대의 영혼이 서서히 가라앉는 어두운 하강까지, 모두 그 한마디 안에서 미리 떨린다.

    높은 것들은 오래 버틸 듯 보인다. 그러나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이 가장 깊이 떨어지기도 한다.

    아하시야의 몸에서 시작된 추락은 곧 사마리아의 역사로 번지고(왕하 17:6), 마침내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번져 간다(왕하 25:8-10). 한 사람의 낙상이 한 왕조의 예고편이 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이 한 번의 추락은 눈앞의 사고를 넘어, 뒤에 올 왕들과 성벽과 폐허의 바람까지 먼저 흔들기 시작한다.

     

    기운 집

    열왕기상은 높은 데서 막을 내린 책처럼 보인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이던 성전의 금빛, 멀리까지 밀려 나가던 국경선, 이름만으로도 무게를 지니던 왕권. 모든 것이 위를 향해 자라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책이 비추는 것은 그 찬란함의 겉면이 아니라 그 속이다.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던 계단 아래에 이미 가느다란 금이 번지고 있었음을, 가장 환한 꼭대기에서부터 흔들림이 오래전 시작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다. 한 왕이 넘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높이가 제 무게를 끝내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처럼 보인다. 왕은 높은 곳에 있었으나, 끝내 자신을 지켜 줄 자리에 서 있지는 못했다.

    이제 그는 침상에 누워 숨을 고르며, 살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물음이 향하는 곳은 여호와가 아니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이다. 병든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상처 난 것은 뼈만이 아니었다. 낙상 뒤에 드러난 것은 더 깊은 균열, 곧 몸의 높이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믿음의 방향이었다.

    사람은 넘어질 때 자신이 어디를 향해 서 있었는지 들킨다. 바닥은 몸만 받아내지 않는다. 마음의 방향까지 받아내어 끝내 드러낸다.

    그래서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멀지 않다. 우리는 사마리아의 다락에 살지 않는다. 왕의 옷을 입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불안이 밀려올 때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곳이 어디인지는, 우리 안의 중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장 높아 보이는 것, 가장 빨리 효험을 약속하는 것, 가장 즉각적으로 두려움을 잠재워 줄 것 같은 것에게 먼저 묻는다. 아하시야도 그랬다. 그는 다른 신에게 몸을 기댔다. 추락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땅으로 떨어진 몸보다 먼저,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마음이 이미 아래로 쏠리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 한 번의 비틀거림이 뒤이어 나올 모든 왕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 입구를 제대로 지나면, 아직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왕들의 윤곽이 벌써 어렴풋이 보인다. 어떤 이는 왕좌에 앉아 있어도 이미 비틀거리고, 어떤 나라는 성벽이 남아 있어도 이미 안쪽부터 무너지고 있다.

    이 서사의 관심은 왕들의 이름과 연대에 있지 않다. 누가 얼마나 오래 버텼는가보다, 마지막에 무엇을 향해 서 있었는가를 묻는다. 그러니 이것을 읽는다는 것은 업적의 수를 세는 일이 아니라, 마음 하나의 방향이 어떻게 집 한 채를 흔들고, 마침내 한 왕국을 폐허로 바꾸는지 오래 지켜보는 일에 더 가깝다.


    선 말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병든 왕이 아니라 길 위에 선 예언자 엘리야다.

    왕은 침상에 있다. 예언자는 바깥에 있다. 한 사람은 이불 위에 누워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먼지 이는 길목에 서 있다. 한 사람은 사람을 보내 묻고, 다른 한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불과 몇 절 사이에 이미 두 세계가 갈라진다.

    이 서두는 권력의 중심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이것은 고대 왕정의 몰락사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누구의 말에 가장 깊이 흔들리는지, 오늘을 향해 묻는 책이 된다.

    역사의 중심은 궁전이 아니다. 높은 다락도 아니다. 말씀을 맡은 자의 입이다. 아하시야가 보낸 사절들은 왕의 명령을 품고 길을 떠나지만, 엘리야는 그 길 한복판에서 그들을 멈춰 세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사마리아와 에그론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는 불안에 잠식된 왕의 질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서 있다.

    이후 모든 장면은 이 구조를 거듭한다. 왕은 흔들리고, 말씀은 선다. 사람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남는다. 왕들은 세력을 의지하고, 동맹을 계산하고, 제국의 틈에서 살아남을 길을 찾는다. 그러나 끝말은 언제나 말씀의 몫이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름 없이 스쳐 가는 예언자들, 그리고 끝내 예레미야로 이어지는 그 음성은 왕조보다 오래 남는다. 궁전의 돌은 무너져도, 말씀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무너진 왕들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무너지지 않는 말씀의 기록이다.

    뒤이어 나오는 하늘의 불 장면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왕하 1:9–14).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은 단지 놀라운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참으로 높은가를 드러내는 표식에 가깝다.

    첫 두 오십부장은 왕의 권위를 앞세워 예언자를 끌어내리려 한다. 갑옷의 쇳빛과 명령의 목소리가 먼저 들린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다르다. 그는 가까이 와서 무릎을 꿇는다.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높아진 목소리 대신 낮아진 숨이 그 자리를 메운다.

    왕좌에 앉은 자와 말씀 앞에 엎드린 자.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오래 남는가? 높아지려는 권력은 오히려 떨어지고, 말씀 앞에 낮아진 사람만 살아남는다. 그 역전의 질서는 첫 장에서 시작되어 끝내 책 전체를 휩쓴다.


    남은 재

    그래서 이 네 절은 책 전체의 축소판을 넘어, 거대한 파국이 처음 금 가는 소리를 들려주는 순간처럼 읽힌다. 유리잔에 생긴 실금 하나가 방 전체의 떨림을 드러내듯, 이 네 절은 이 긴 책의 운명을 먼저 떨리게 한다.

    배반, 추락, 우상, 예언, 심판. 다섯 개의 낱말뿐인데도, 벌써 어둡다.

    모압의 배반과 아하시야의 추락, 바알세붑에게 묻는 불안과 엘리야의 말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무너짐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치지 않는다는 것. 먼저 중심이 비고, 그다음 질서가 흔들리고, 마침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차례로 무너진다는 것. 파국은 마지막에야 눈에 띄지만, 붕괴는 훨씬 먼저 시작된다.

    바람을 막아 주어야 할 난간 하나가 먼저 삐걱거린다. 그다음에는 왕의 숨이 가빠진다. 그다음에는 왕이 의지하던 이름과 제단과 질서가 비틀린다. 마침내 성벽이 금 가고, 성전이 흔들리고, 도시 전체가 먼지처럼 주저앉는다.

    여기서 붙들어야 할 것은 무너짐의 속도보다 그 방향이다. 어디서부터 금이 갔는지, 무엇이 먼저 비어 버렸는지, 그 보이지 않는 시작점을 끝까지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붕괴도, 예루살렘의 화염도 단지 군사력의 실패로만 읽히지 않는다. 시선은 더 깊은 곳을 향한다.

    하나님 없는 높이. 말씀 없는 권력. 회개 없는 종교. 겉으로는 서 있어도 안쪽은 이미 빈 중심. 성전의 기둥은 아직 서 있고, 왕관의 금빛도 잠시 햇빛을 붙든다. 돌은 한동안 버틴다. 제도도 잠시 남아 있다. 그러나 중심이 무너지면, 그 뒤의 붕괴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폐허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보이지 않는 충성이었다. 성전이 불타기 전에 이미 마음의 성전이 식어 있었고, 성문이 깨지기 전에 이미 영혼의 문지방은 비어 있었다.

    불에 그을린 기둥의 검은 결, 깨진 성문 곁에 흩어진 돌들, 텅 빈 왕궁 뜰에 여러 시대의 적막처럼 내려앉은 재, 발자국보다 바람이 먼저 지나는 거리. 한때는 말발굽 소리와 행렬의 음악과 왕의 명령이 오가던 자리에, 이제는 재와 적막만 얇게 포개져 있다. 폐허는 한 번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사람을 그 앞에 오래 세워 둔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멸망의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멀쩡히 굴러가는 듯 보이는 시대, 속도와 성취와 연결이 삶을 떠받치는 듯 보이는 시대에 더 깊이 박힌다. 사람은 무너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조는 무너지고 성전은 불타고 백성은 끌려간다. 그러나 말씀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두루마리는 불탈 수 있어도, 말씀 자체는 타지 않는다. 왕의 이름은 흙먼지 속에 묻혀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른 입과 다른 세기와 다른 폐허를 건너 살아남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단단하다고 믿는 그 자리는 정말 단단한가? 삶이 갑자기 삐걱거릴 때, 우리는 누구에게 먼저 묻게 될 것인가?

    성과, 평판, 자리, 관계, 자산, 건강, 정보, 연결망. 우리는 그것들을 붙들고 산다고 믿지만,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사마리아의 난간처럼 어느 날 문득 흔들릴 때, 우리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무엇이 끝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인가?

    난간에서 미끄러진 한 왕의 몸이 어느새 우리 자신의 서문처럼 읽힐 때가 있다. 겉으로는 곧게 서 있는 듯해도 속으로는 오래전부터 한쪽으로 쏠려 있던 삶. 바깥의 배반보다 먼저 안에서 시작된 붕괴. 그때 이것은 먼 왕조의 비망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높은 것들의 위태로움을 본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는 음성이 있다. 재가 날리는 폐허 한복판에서, 더는 의지할 높은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자리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말씀의 음성.

    어쩌면 이것은 그 음성을 듣기 위해 사람이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지를 묻는 책인지도 모른다.

     

    ※ 이 책은 오랫동안 신명기역사서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읽혀 왔다. 마르틴 노트 이후 많은 학자들은 열왕기를 단순한 왕조 기록이 아니라, 왜 한 나라가 무너졌는지를 신학적으로 묻는 책으로 보았다. 이후의 연구는 이 책을 한 번에 쓰인 단일한 기록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쌓인 기억과 해석이 겹쳐진 책으로 더 세심하게 읽어 왔다. 토마스 뢰머, 마빈 스위니, 모르드카이 코건 같은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결을 따라 이 책의 역사적 깊이와 신학적 의도, 그리고 서사적 구성을 밝혀 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열왕기하 1장은 한 왕의 낙상이 아니라, 책 전체의 방향을 미리 비추는 첫 장면으로 읽힌다. 곧 아하시야의 추락, 바알세붑에게 묻는 불안, 엘리야의 말씀이 뒤이어 펼쳐질 몰락과 심판, 그리고 끝내 남는 말씀의 주제를 미리 울려 준다는 것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