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긍휼,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르다 (뉴스앤조이) 2026-8-7
페이지 정보

본문
긍휼,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르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호세아 1:1-2:1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무너지기 직전의 사마리아는 눈부셨다. 시장에는 기름 항아리와 포도주 단지가 층층이 쌓였고, 먼 국경 너머에서 온 물건들이 한낮의 빛을 되비추었다. 왕궁의 지도에는 되찾은 영토가 다시 그려졌고, 성소에는 제물 타는 냄새가 그치지 않았다. 나라는 강했다. 모두가 이 빛이 오래가리라 믿었다. 아무도 그 눈부심 속에서 이미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호세아서의 첫 절에는 왕들의 이름이 길게 놓여 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여로보암. 한때 시대를 움직였던 이름들이다. 그러나 왕들은 지나갔고, 끝내 남은 것은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호 1:1).
그 말씀은 왕궁이 아니라 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아직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태어난 시대도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호세아는 그를 이스르엘이라 불렀다. 다음 아이는 로루하마, 그다음 아이는 로암미라 불렸다.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 집에는 심판의 이름이 하나씩 늘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아이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쪽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에는 피 흘린 들판과 거두어진 긍휼, 끊어진 관계가 새겨져 있었다. 한 가정의 족보가 한 나라의 판결문이 되었다.
예언자는 말씀을 입술로만 전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내어준다. 호세아의 집은 예언을 설명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한 시대의 균열이 가장 먼저 몸과 이름으로 드러난 자리였다.
호세아서의 첫 장에는 이미 책 전체가 들어 있다. 떠나는 백성과 뒤따르는 사랑, 심판의 이름과 다시 불리는 부름. 하나님은 버려도 할 말 없는 백성을 끝내 버리지 않으신다. 모든 것이 끊어진 자리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다.
긍휼.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호세아가 말씀을 받은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강해 보였다. 여로보암 2세 아래 영토는 넓어졌고 시장에는 풍요가 넘쳤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는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기울었고, 국경 너머에서는 아시리아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호세아의 말은 성소에만 머물지 않았다. 왕궁과 시장, 거짓 동맹과 그 아래 흐르는 폭력까지 겨누었다.
번영은 망각을 닮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다. 그러나 곡식과 포도주는 바알이 주었다고 믿었고, 위기 앞에서는 하나님보다 아시리아와 이집트를 먼저 바라보았다. 입술에는 하나님이 있었지만, 삶은 왕과 제국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
호세아는 그것을 음란이라 불렀다. 단순한 성적 타락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도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배반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만이 배신을 아파한다.
그러나 이 은유를 고멜 한 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본문이 겨누는 것은 왕과 제사장, 정치와 경제, 외교와 예배를 아우르는 “이 나라”다. 성경은 고멜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처를 말하면서, 한 여인의 침묵마저 다시 지워서는 안 된다.
공적인 죄는 가장 사적인 방까지 들어온다. 왕이 일으킨 전쟁은 아이의 이름이 되고, 불의한 경제는 식탁을 비우며, 그릇된 동맹은 다음 세대의 불안으로 남는다. 호세아의 집은 한 나라의 배반이 몸과 관계와 이름에 새겨진 자리였다.
오늘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공동체는 성장하면서 서로를 잃고, 예배를 이어 가면서도 하나님을 삶의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다. 교회의 이름은 남아 있지만, 우리의 시간과 소비와 선택을 바꾸는 복음의 요구는 조용히 지워진다.
신앙을 버리지 않고도 하나님을 잃을 수 있다.
호세아서는 그 풍요의 한복판에 한 집을 세운다. 거리는 태평성대를 노래하지만, 아이들의 이름은 이미 무너진 관계를 증언한다. 마지막 아이의 이름에는 가장 깊은 단절이 새겨진다.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부정어가 된 이름
첫째 아이의 이름은 이스르엘이었다. 예후가 피를 흘려 왕조를 세운 들판의 이름이다. 나라는 그것을 승리라 기록했지만, 하나님은 한 아이의 이름으로 그 피를 다시 불러내셨다. 잊힌 피가 사라진 피는 아니었다.
둘째 아이는 로루하마, ‘긍휼을 받지 못한 자’라 불렸다. 셋째 아이는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이름을 받았다. 첫 이름이 나라의 폭력을 드러냈다면, 뒤의 두 이름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단절을 말했다. 긍휼은 거두어졌고, “내 백성”이라는 부름마저 끊어졌다.
아이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의 판결을 이름으로 떠안았다. 어른들의 배반이 아이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호세아서는 그 불편한 장면을 비켜 가지 않는다. 죄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끝내 누군가의 몸과 이름에 닿는다.
전쟁을 결정한 이와 그 전쟁에서 부모를 잃는 아이는 다르다. 제도를 만든 이와 그 바깥으로 밀려나는 이도 다르다. 국경선을 그은 이와 그 선 앞에서 이름을 의심받는 이도 다르다. 권력의 결정은 가장 약한 이에게 가장 무거운 이름으로 도착한다.
오늘도 이름 앞에는 부정어가 붙는다. 미등록, 부적격, 실패자, 문제아. 한 단어가 얼굴보다 먼저 도착하고, 오래 불린 이름은 마침내 운명처럼 몸에 밴다. 로루하마와 로암미는 오래전 호세아의 집에만 머물지 않는다. 보호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믿게 된 이의 안에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첫 장은 심판의 이름에서 멈추지 않는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하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겠다고 하신다(호 1:10). 백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심판의 이름 곁에 벌써 새 이름이 놓인다.
더 놀라운 반전은 2장 1절에 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하나님만 이름을 고쳐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형제와 자매도 서로를 다시 불러야 한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리던 이를 ‘내 백성’이라, ‘긍휼을 받지 못한 자’를 ‘긍휼을 입은 자’라 불러야 한다.
회복은 부르는 말에서 시작된다. 긍휼은 마음속에 머무는 온기가 아니라, 밀려난 이를 다시 우리라고 부르는 일이다. 호세아서는 긍휼을 설명하지 않는다. 한 이름에서 부정어를 지우는 것으로 보여 준다.
로루하마에서 루하마로.
로암미에서 암미로.
긍휼은 죄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이스르엘의 피와 우상숭배와 불의를 기억하면서도, 실패를 한 사람의 마지막 이름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죄를 심판하되, 죄인까지 그 죄 속에 가두지 않는 사랑이다.
그래서 호세아서의 더 깊은 질문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했는가가 아니다. 관계가 여기까지 무너졌는데도 하나님은 왜 끝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는가? 왜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내 백성”이라는 이름을 준비하시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면, 심판을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긍휼이 불붙는 장면에 이른다.
견디지 못한 마음
호세아서 11장에 이르면 부부의 은유는 부모와 자녀의 은유로 옮아간다. 하나님은 어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다.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았으며, 사랑의 줄로 이끌고 몸을 굽혀 먹이셨다(호 11:1, 3-4).
그러나 아이는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를수록 멀어졌고, 바알에게 제사했으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끝내 거부했다. 같은 배반이 오래 되풀이되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시리아의 지배와 칼의 심판을 말씀하신다(호 11:2, 5-7).
그러다 말씀이 멈춘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
하나님이 자신에게 묻는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다. 심판의 이유를 모두 아시면서도, 끝내 그 손을 놓는 일을 견디지 못하신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돌이켜야 할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먼저 불붙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죄가 가벼워서도, 심판이 부당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덮지 않으시면서도 관계를 파괴로 끝내지 않으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호 11:9).
하나님의 거룩함은 상처받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상처를 멸망으로 되갚지 않는 데 있다. 죄를 엄중히 심판하시되, 그 심판이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우상은 아파하지 않는다. 돌과 나무는 사람이 떠나도 침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잃어버린 관계 앞에서 탄식하신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풍요와 군사력과 외교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논증하지 않는다. 백성이 그분을 지운 뒤에도, 그 백성을 지우지 못하는 마음을 보여 준다.
긍휼은 그 아픔의 이름이다.
긍휼은 사람이 다시 사랑받을 만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르엘의 피와 불의한 제사와 거짓 동맹을 기억하신다. 다만 한 사람을 그가 저지른 죄의 이름 속에 영원히 가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로루하마와 로암미에서 ‘로’를 지우신다. 긍휼을 받지 못한 이를 긍휼을 입은 이라, 내 백성이 아니었던 이를 다시 내 백성이라 부르신다. 지워지는 것은 부정어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부정어가 지워질 때,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그것이 마지막 이름이 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호세아서의 사랑은 배반 앞에서 무력하지 않다. 떠난 백성을 찾고, 심판을 말하면서도 광야에서 다시 마음에 말한다. 상처 입고도 다시 부른다. 배반이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도록.
끝났다고 여긴 자리에서, 이름이 다시 들린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서 십자가의 먼 그림자를 본다. 그러나 서둘러 그곳으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 먼저 호세아서의 문지방에 머물러야 한다. 버림받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파하시며, 그 아픔 속에서 어떻게 다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지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도 너무 오래 불려 본래의 이름처럼 굳어진 말들이 있다. 실패자, 이방인, 부적격자, 문제 있는 사람. 가족과 사회와 종교가 붙인 이름들이다. 오래 들은 부정어는 마침내 목소리가 되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른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이름 앞에 부정어를 붙여 두었을 것이다. 바깥에 세운 사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여긴 사람, 긍휼마저 아깝다고 생각한 사람.
호세아서는 그 이름 앞에서 우리를 멈추어 세운다.
호세아서의 문지방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깥에 세워 둔 사람을 가리키신다.
암미라 하라.
루하마라 하라.
왕들은 지나갔고 왕국은 무너졌다. 그러나 호세아에게 임한 말씀은 남아, 심판의 이름에서 부정어 하나를 지운다.
로루하마에서 루하마로.
로암미에서 암미로.
지워지는 것은 부정어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지워질 때,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
호세아서를 다시 펼친다는 것은 그 작은 소리를 듣는 일이다.
한 이름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
※ J. 앤드루 디어먼은 호세아의 역사적 배경과 언약 전통, 시적 은유를 함께 읽는다. 길리 쿠글러는 호세아 11장의 어버이–아들 은유에 고대 근동의 왕권과 봉신 관계가 겹쳐 있다고 본다. 부부의 은유가 배반의 상처를 드러냈다면, 어버이–아들 은유는 출애굽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양육, 그리고 반역한 아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는 긍휼을 드러낸다.
호세아서의 문장
긍휼은 죄보다 오래 이름을 부른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 다음글2026년 8월 2일 26.08.02

